[조동(朝東)100년] ② 조선일보 윤전기는 왜 철거됐나

2020년 03월 06일 18시 44분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 폐간 직전까지 이 신문을 찍어내던 윤전기는 높이 2.5미터, 무게 41톤이다. 이 초대형 윤전기는 조선일보의 표현을 빌자면 “검은 빛과 잿빛으로 웅크린”, “무정한 쇳덩이”로 한동안 독립기념관 제6전시관에 전시돼 있었다.

1986년 조선일보사가 독립기념관에 기증해 전시될 당시 이 윤전기에는 “1940년 폐간될 때까지 (조선일보) 신문을 인쇄하던 윤전기”라는 짧은 설명이 붙어 있었다. 

조선일보는 이 윤전기가 “해방 전후의 파란만장했던 한국사가 새겨진 민족의 자산”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윤전기는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 8월 전시관에서 철거됐고, 현재 독립기념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 조선일보 윤전기

철거가 결정될 당시 조선일보는 “우리 국민을 경악하게 하는 대사건”이라고 반발했다. ‘권력은 역사도 철거하는가’라는 사설에서 “중국의 문화 혁명과 다를 바 없다”, “역사에 대한 바른 평가가 내려질때까지 이 윤전기를 지켜낼 것이다”라고도 했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윤전기 철거 과정이 “모택동 시절 중국역사를 후퇴시킨 문화혁명과 홍위병이 연상”된다는 내용의 대변인 논평을 냈다. 

철거 5년이 지난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다. 독립기념관은 상급기관인 국가보훈처에서 한통의 공문을 받았다. 당시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은 이렇게 회상했다. 

“독립기념관장으로 근무하는 중 정권이 바뀌었어요.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며칠 후 국가보훈처에서 공문이 왔어요. 조선일보 윤전기를 철거하는 배경, 과정을 보고를 해달라고.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그건 그때 이미 다 끝난 일이다. 누구보다도 보훈처가 잘 알고, 조선일보가 훤히 다 알고 있는 사항을 이제 와서 왜 뭐 때문에 새삼스럽게 보고해달라고 하느냐. 해 줄 수 없다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저에 대한 압력과 뒷조사도 하고, 또 언제 사표내느냐 그래서 2~3일 만에 사표 쓰고 나왔죠.”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 1939년 1월 1일 조선일보 1면

조선일보는 철거된 윤전기가 “일제하 오욕의 역사를 지켜 본 증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작 ‘명예를 더럽혀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만든’ 오욕(汚辱)의 역사, 즉 친일반민족행위의 내용과 실체에 대해서는 조선일보 스스로 말하지 않고 있다.

1988년 온 국민이 지켜 본 언론 청문회에서 증인으로 나온 당시 조선일보 사장 고 방우영(현 조선일보 사장 방상훈의 숙부)은 이렇게 강변했다. 

“혹독한 조선총독부 밑에서 피흘리고 고문당하고 옥사를 하면서까지 겨레를 위하고 민족의 존립을 위해서 끝까지 목숨으로 싸우다가 조선, 동아는 끝내 폐간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친일을 했다고 하면, 어떻게 그러한 근거를 가지고 말씀하십니까?”

고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 1988년 증언

일제 강점기 조선과 동아 두 신문은 어떤 기사를 내보냈을까? 자세히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독립기념관 전시관에서 철거된 ‘무정한 쇳덩이’, 윤전기는 말이 없다. 

뉴스타파는 1920년 창간 이후 1940년 폐간까지 약 20년 동안 조선, 동아 두 신문이 써내려 간 지면을 각 시기별로 분석했다. 이를 위해 민족문제연구소, 역사디자인연구소와 함께 조사를 진행했다. 언론 학자들의 자문도 받았다. 

뉴스타파는 특히 두 신문 지면 변화의 변곡점이었던 1937년 한반도 정세와 조선총독부의 정책 변화에 따른 두 신문의 대응 과정에 주목했다. 중일전쟁 등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과 지원병 제도 등 식민지 수탈 정책에 두 신문이 어떤 식으로 호응하며 사설과 기사를 써내려 갔는지 추적했다. 올바른 역사 평가를 위해 그 결과를 다음 편(3월 9일)에서 공개한다.


제작진
취재박중석 김용진 최윤원 조현미 홍주환
데이터최윤원
촬영최형석 신영철
편집윤석민
그래픽정동우
디자인이도현
출판허현재
공동기획민족문제연구소
공동조사역사디자인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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