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력평가원, 유명출판사 한국사 교과서 표절 의혹

2024년 09월 05일 17시 16분

친일·독재정권 서술 축소 등으로 우편향 논란을 빚은 한국학력평가원(학력평가원)의 한국사 교과서가 다른 유명 출판사의 2015 교육과정 검정교과서를 베껴 쓴 정황이 뉴스타파 취재 결과 확인됐다. 출판 실적 조작에 이어 검정 합격 취소 사유가 추가로 드러난 것이다.
뉴스타파는 지난 8월 검정에 합격한 학력평가원의 ‘한국사1’ 교과서와 유명출판사 A사의 2015 교육과정 한국사 교과서(2020년 초판)를 비교·검토하는 과정에서 학력평가원이 A사 교과서를 표절한 것으로 의심되는 부분들을 발견했다. A사의 한국사 교과서는 학교 현장에서 채택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타 출판사 ‘2015 한국사 교과서’ 문장·전개와 판박이

A사 교과서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긴 흔적이 가장 뚜렷한 대목은 3단원의 첫번째 소단원 ‘국제 질서의 변동과 개항’ 부분이다. 이 단원에서는 19세기 후반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동아시아 침략과 불평등 조약을 다룬다. 학력평가원 교과서는 “서구 열강은 상품 판매 시장과 원료 공급지를 확보하고, 잉여 자본을 투자하기 위해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식민지와 새로운 통상로를 확보하려 하였다(108쪽)”고 썼다. 그런데 A사의 교과서에는 “서구 열강은 상품 판매 시장과 원료 공급지를 확보하고 잉여 자본을 투자하기 위해 식민지가 필요하였다(86쪽)는 거의 비슷한 문장이 쓰였다.  
학력평가원 교과서는 같은 쪽 바로 다음 문단에서 ‘청과 일본의 문호 개방’ 설명을 시작하면서 “영국은 중국산 차와 비단의 수입으로 무역 불균형이 심해지자, 무역 적자를 메우기 위해 인도산 아편을 청에 밀수출하였다. … 이를 빌미로 제1차 아편 전쟁을 일으켰다(108~109쪽)”고 썼다. A사 교과서에도 “영국은 차와 비단의 수입으로 무역 적자가 커지자 인도산 아편을 청에 밀수출하였다. … 이를 빌미로 아편 전쟁을 일으켰다(87쪽)”며 일부 용어만 다른 유사한 문장이 나온다.  
▲한국학력평가원의 한국사 1, 2 검정교과서 표지. 학력평가원은 올해 처음 교과서 검정에 합격했다.
같은 단원의 ‘오페르트 도굴 미수 사건’ 서술에서도 일부 수정만 거친 표절 의심 대목이 발견된다. 학력평가원 교과서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조선에 들어와 몇 차례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그러자 오페르트는 프랑스 선교사와 미국 자본가의 지원을 받아 …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여 조선 정부와 협상하려 하였다. 하지만 준비 부족과 시간 문제 등으로 도굴은 실패로 끝이 났다(111쪽)”고 썼다. A사 교과서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조선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러자 미국인 자본가와 프랑스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무장한 선원들을 데리고 덕산군 관아를 습격하였다. 또한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여 통상을 요구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90쪽)”고 썼다. 연속된 문장을 그대로 옮기면서 사건의 전개 순서, 연결사도 그대로 둔 채 단어 순서 등만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학력평가원의 한국사1 교과서에는 A사 교과서 본문 문장과 거의 같거나 ▲단어 순서 바꾸기 ▲문장 쪼개기 ▲용어 변경 등의 수법으로 일부 수정만 가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 수십 건 확인된다. 표절 의심 문장이 등장하는 전후의 인접 문장뿐 아니라 각 문단의 전개 순서까지 유사한 사례들이다.

모든 단원에서 발견…조직적인 ‘베끼기’ 있었나

학력평가원의 한국사1 교과서의 3개 단원은 전체 집필진 5명 가운데 4명이 나눠 집필했다. 그런데 A사 교과서를 베낀 것으로 의심되는 대목은 1단원 ‘한국사의 이해’, 2단원 ‘근대 이전 한국사의 탐구’, 3단원 ‘근대국가 수립의 노력’까지 모든 단원에서 발견됐다. 뉴스타파와 연락이 닿은 A사의 2015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 중 한 사람은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교과서 집필 경험이 없는 집필진들이 교과서를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며 “A사 교과서뿐 아니라 다른 교과서도 함께 참고하면서 원고를 썼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학력평가원은 교과서 검정 신청 요건인 출판 실적을 조작한 사실이 확인된 데 이어 경쟁 출판사의 저작권을 침해한 표절 정황까지 드러났다. 교육부가 교과용도서에 관한 규정에 따라 검정 합격 취소, 발행 정지 처분을 내릴 수 있는 사안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따르면 검정 합격이 취소된 교과서의 발행자에게는 일정 기간 검정 신청 자격을 제한할 수도 있다. 교육부는 학력평가원의 검정 신청 자격 조작 문제에 대해 여전히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국회 교육위원회 강경숙 의원(조국혁신당)은 “교육부와 교육과정평가원의 역사교과서 검정시스템이 총체적 난국임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출판 자격, 필자, 기술까지 문제가 되지 않고 있는 영역이 없다. 교육부장관은 계속 사실 확인 운운하지 말고 적극적인 조사 및 감사를 통해 진실을 밝히고 검정을 취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합격이 발표된 새 한국사 검정교과서 9종은 현재 전시본이 학교 현장에 배부된 상태다. 일선 학교에서는 전시본을 검토한 뒤 다음달까지 교과서 채택을 완료하고, 내년 3월 신학기부터 새 교과서로 수업을 하게 된다. 학교 현장의 혼란을 최소화하려면, 교육부가 서둘러 학력평가원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밝히고 제재 처분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뉴스타파 취재팀은 독자적으로 학력평가원 교과서와 A사 교과서를 검토하면서 표절 의심 대목을 확인하고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들을 아래에 공개한다. ‘▲’ 이하 내용은 학력평가원 한국사1 교과서 본문의 표절 의심 부분, ‘△’ 이하 내용은 A사의 2015 한국사 교과서 본문에서 발췌했다.
한국학력평가원 한국사1 교과서A사 2015 한국사 교과서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도움으로 왜를 물리친 신라는 한동안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다.(18쪽)△신라는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도움으로 왜군을 격퇴한한동안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다.(21쪽)
신라의 삼국 통일은 그 과정에서 외세의 협조를 얻었다는 점과 대동강 하구에서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한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것에 그쳤다는 한계성이 있다. 그러나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몰아낸 사실에서 자주적 성격을 인정할 수 있다.(20쪽)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과 대동강 이남의 영토를 확보하는 데 그쳤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다. 하지만 끈질긴 항쟁 끝에 당군을 물리친 사실은 자주적 성격을 보여 준다.(22쪽)
▲통일 신라는 삼국의 옛 땅에 3주씩 배치하여 전국을 9주로 나누었다. 동남쪽에 치우친 수도의 한계를 보완하고자 군사·행정의 요충지에는 5소경을 설치하였다.(21쪽)△9주는 삼국의 옛 땅에 3개 주씩 고르게 설치되었다. 5소경은 군사·행정의 요충지에 설치되어 수도가 동남쪽에 치우친 점을 보완하고…(23쪽)
고구려 멸망 후 당은 고구려의 유민을 요서 지역을 비롯한 당의 여러 곳으로 강제 이주 시켰다. 당시 요서 지역은 당의 감시와 통제 아래 고구려·말갈·거란인이 함께 있었다. … 고구려 출신의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요서를 탈출하여 고구려의 옛 땅인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하였다(698).(22쪽)고구려 멸망 후 요서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한 고구려 유민은 당의 감시와 통제를 받고 있었다. … 고구려의 장군 출신인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이끌고 요서를 탈출하여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하였다(698).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만에 그 옛 땅에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가 등장한 것이다.(25쪽)
이후 한동안 왕위 쟁탈전은 격화되었고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교체되었다. … 진골 귀족들은 농장·노비·사병을 확대하고 사치와 향락을 일삼았다. … 당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6두품들은 골품제를 비판하며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개혁을 주장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신라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23쪽)이후 신라에서는 155년 동안 20명의 왕이 교체될 정도로 왕위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 진골 귀족은 농장과 노비, 사병을 늘려 세력을 확대하면서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 당에 유학했던 일부 6두품 출신 학자는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골품제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反)신라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24쪽)
▲지방에는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보다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이 더 많았으나 후대로 가면서 속현의 수는 점차 감소하였다.(28쪽)△군현은 지방관(수령)이 파견되는 주현과 파견되지 않은 속현으로 구분되었는데, 초기에는 속현의 수가 훨씬 많았으나 후대로 가면서 점차 감소하였다.(38쪽)
음서를 통해 공신이나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은 과거 시험을 치지 않고 관직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과거제와 음서는 고려 귀족 사회를 대표하는 관리 등용 제도였다. 하지만 고위 관리에 오르려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유리하였기 때문에 음서 출신 중 상당수가 과거에 다시 응시하는 경우가 많았다.(29쪽)음서는 공신이나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나갈 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그렇지만 고위 관리에 오르려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유리하였기 때문에 음서로 관리가 되더라도 과거에 응시하는 경우가 많았다.(39쪽)
최충헌이 정권을 잡으면서 사병 조직인 도방을 확대하였고 최고 집권 기구로 교정도감을 설치하였다. 그의 아들 최우는 정방을 자신의 집에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하였다.(30쪽)최충헌은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권력 기구로 교정도감을 설치하였고, 신변을 경호하던 사병 집단인 도방을 확대하였다. … 그의 뒤를 이은 최우는 자신의 집에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하였다.(43쪽)
모든 군현에 지방관인 수령을 파견하였다. … 수령의 권한이 강화되어 지방의 행정·사법·군사 업무를 총괄하였고, 향리는 수령을 보좌하거나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역할에 머물러 그 지위가 고려 시대에 비해 낮아졌다.(35쪽)모든 군현에는 수령이 파견되었다. 수령은 국왕의 대리인으로 행정·사법·군사권을 행사하였다. 반면 향리는 수령을 보좌하며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역할에 머물러 그 지위가 이전에 비해 낮아졌다.(58쪽)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인조와 서인 세력은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 이후 국력이 더욱 강성해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황제국을 표방하며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다.(61쪽)△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은 명분을 앞세워 친명 배금 정책을 폈다. … 그 후 세력이 더욱 강해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군신 관계를 강요하였다.(66쪽)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원료인 광물에 대한 수요도 커졌다. 정부에서도 국가 재정을 보충하고, 청과의 교역 수단인 은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17세기 중엽부터 민간 업자에게 광물 채굴을 허용하고 세금을 받는 정책이 시행되었고 그 결과 은광을 비롯한 광산 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 광산 경영 방식에서 덕대라 불리는 경영 전문가가 상인으로부터 자금 조달을 받아 채굴업자·채굴 노동자·제련 노동자 등 광꾼을 고용하여 광산을 경영하는 덕대제가 유행하였다.(71쪽)수공업이 발달하자 그 원료인 광산물 수요가 급증하여 광업도 활성화되었다. 민간의 광산 개발을 금지하던 정부가 17세기 이후 이를 허용하고 세금을 거두는 정책을 시행하면서 광산 개발이 촉진되었다. 특히 청과의 무역이 성행하여 결제 수단인 은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은광 개발이 활기를 띠었다. … 광산개발은 주로 덕대라는 전문 경영인이 상인 물주로부터 자본을 조달받아 채굴업자인 혈주와 노동자를 고용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72쪽)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는 로즈 제독이 이끄는 군대를 보내 조선을 침략하였다(병인양요, 1866). … 프랑스군의 약탈과 살인에 대항하여 한성근 부대가 문수산성에서 싸웠고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다.(110쪽)프랑스는 병인박해를 구실로 군함을 보내 조선을 침략하였다(병인양요). 프랑스군은 선전 포고도 없이 강화도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였다. 이에 맞서 한성근 부대가 문수산성에서 격전을 벌였고, 양헌수 부대가 삼랑성(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다.(90쪽)
▲1880년 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이 청의 외교관이 쓴 『조선책략』을 가지고 돌아왔다. 황준헌의 『조선책략』에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조선이 중국·일본·미국과 손잡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조선책략』이 유포되면서 미국과의 조약 체결이 힘을 얻는 가운데, 청의 알선으로 조선은 미국과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1882).(115쪽)△이 무렵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홍집이 청의 외교관이 쓴 『조선책략』을 가지고 돌아왔다. 『조선책략』에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조선이 중국, 일본, 미국과 손잡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조선책략』의 유포로 미국과 외교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는 가운데, 조선은 청의 알선으로 미국과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1882).(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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