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개혁] 연공형 임금체계가 임금 격차 문제의 근원일까

2023년 02월 03일 13시 45분

직무 중심, 성과급 중심의 전환을 추진하는 기업과 귀족 강성 노조와 타협해 연공서열 시스템에 매몰되는 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 역시 차별화되어야 합니다.

윤석열 대통령 2023년 신년사 중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 개혁 가운데 핵심 요소는 임금체계 개편입니다. 노동자의 근속연수, 연령 등을 기준으로 임금을 차등하는 연공(年功) 형 임금체계가 신규채용 기회를 가로막고 있어서 좋은 일자리 창출이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고용노동부가 근로시간 개편과 임금체계 개편을 논의하기 위해 발족시킨 학계 중심의 미래노동시장연구회도 권고문을 통해 연공형 중심의 임금체계를 바꿔야 한다고 주문했습니다.
연공형 임금체계는 다수에게 불공정합니다. 이는 연공의 안정적 누적이 가능한 계층에게 배타적으로 유리합니다. 노조가 있는 대기업 사업장에 종사하는 정규직 남성의 임금이 높은 이유는 연공 축적이 가능한 유일한 계층이기 때문입니다.

미래노동시장연구회 권고문 2022년 12월

호봉제만 손보면 된다? 태반이 임금체계 없는 '만년 최저임금'

앞선 기사 <노동시장 이중구조는 ‘노-노 착취’ 때문일까>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강조하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의 핵심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생산성 격차라는 점을 짚었습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공정한 거래 구조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지만, 정작 이 문제에는 침묵한 채 이른바 '노조 때리기'에 집중하는 정부의 행보를 지적했습니다. 임금체계 개편의 문제도 내막을 살펴보면 정부의 '겉 다르고 속 다른' 행보가 고스란히 보입니다. 
연공형 임금체계의 대표적인 사례는 호봉제입니다. 우리나라의 전체 사업체 164만 곳 가운데 호봉제를 적용하는 기업은 22만 곳으로 전체의 13.7% 수준입니다. 그런데 호봉제의 문제점을 논의하기 전에 먼저 따져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61.1%, 무려 95만 곳이 넘는 기업들은 아예 임금체계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라는 점입니다.
▶전체 사업체 가운데 61%는 임금체계가 없다. 호봉급을 도입한 곳은 13.7%다.
▶임금체계가 없는 기업의 비율은 계속 늘고 있는 반면, 호봉급 체계의 기업 비율은 줄고 있다.
심지어 임금체계가 없는 사업장의 비율은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2014년 48.5%(60만 곳)였던 것이 2021년 61.1%(95만 곳)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반면 호봉제를 채택하는 기업의 비율은 27.1%(34만 곳)에서 13.7%(21만 곳)로 자연히 줄어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임금체계가 없는 사업장이라고 하면 어떤 기업을 말하는 걸까요. 대부분의 대기업, 중견기업, 그리고 노조가 자리 잡은 사업장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임금체계를 갖추기 마련입니다. 임금 체계가 없는 사업장 95만 곳 가운데 81만 곳, 약 85%는 직원 수 5인 이하의 영세 사업장입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이 같은 영세 기업의 월평균 급여는 200만 원 수준, 결국 영세 사업장에서 최저임금 수준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임금 체계도 갖추지 못하고 일하고 있는 것이 진짜 문제라는 것입니다.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2차 노동시장(중소기업, 비정규직)의 노동자 상당수가 입사해도 최저임금을 받고 10년이 지나도 최저임금을 받는 것이 우리 사회의 노동 현실"이라며 "1차 노동시장에 계신 분들이 노동법의 보호를 받는 것이 부당한 것이 아니라 2차 노동시장에 계신 분들이 그런 식의 보호 기제를 받지 못하는 것이 부당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대통령의 말대로 노동자들의 임금 불평등이 연공급 임금체계 때문이라면 다른 나라에 비해 장기근속자 비중이 높아야 합니다. 하지만 OECD 주요 국가들 가운데 우리나라는 오히려 10년 이상 장기근속자 비중이 21.3%로 최하 수준입니다. OECD 평균 33.5%에도 크게 못 미칩니다. 반면, 1년 미만 단기 근속자 비중은 32.2%로 OECD 최상위권입니다. 연공형 임금체계로 오래 일한 노동자가 많은 게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오랫동안 일할 여건이 되지 못해서 임금이 적은 노동자가 많은 것이 진짜 문제라는 것입니다.
▶OECD 주요국가들과 비교하면 한국의 10년 이상 장기근속자 비중은 최하 수준이고, 1년 미만 단기근속자 비중은 최고 수준이다.
문영만 부경대 경제사회연구소 연구교수는 이에 대해 “연공형 임금체계가 임금불평등의 주요 원인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라며 “노동시장의 비정규직화 등으로 우리나라의 고용안정성이 매우 취약한 상태라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해석합니다.
미래노동시장연구회는 권고안에서 "임금의 연공성이 큰 기업일수록 비정규직 비율이 높고, 기업 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차이가 크게 나타난다"라고 하면서 임금체계 개편을 권고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호봉제를 택한 기업의 비율은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높지만, 거꾸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은 중소기업이 훨씬 높게 나타납니다. 앞선 보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중소기업일수록 지불 능력이 떨어져서 저임금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고용해 연명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해석일 것입니다.
▶호봉급 비율은 대기업이 중소기업보다 높다. 하지만 비정규직 비율은 중소기업이 더 높다. 

핵심 빠진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 속내는 대기업 민원 해결?

똑같은 일을 하면서 월급이 차이가 나고 차별하는 것은 현대 문명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 2023년 1월
윤 대통령이 말한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부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남녀고용평등법 제8조 1항
-사업주는 동일한 사업 내의 동일한 가치 노동에 대하여는 동일한 임금을 지급하여야 한다.
우리나라는 이미 34년 전에 남녀고용평등법에서 이 정신을 법제화했습니다. 위반 시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처벌 규정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선 거의 이 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동일 가치의 노동이라는 법 내용이 모호하다며 시시때때로 법률적 쟁점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이 법은 판례를 통해 동일 기업 내에서만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것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나라 임금 불평등의 문제가 사업장 내보다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과 하청 간의 임금 불평등이 더 근본적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현행 법체계 안에서는 대통령이 강조하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구호가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원칙 그대로, 2차 노동시장의 노동자들의 소득을 끌어올릴 수 있어야 우리 사회 전체의 임금 불평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추진하는 임금체계 개편은 여전히 기업 내 임금체계 개편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연공급제에서 직무성과급제로 바꾸는 기업에 대해 세제 지원 등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는 식입니다. 정부가 주겠다는 인센티브는 주로 대기업을 대상으로 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호봉제를 시행하고 있는 중소기업은 14% 정도에 불과하고 대기업은  60%에 이릅니다. 
게다가 대기업 전체 정규직 임금노동자는 256만 명으로 전체 임금 노동자 2천70만 명 가운데 12%밖에 되지 않습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구호를 외치면서 얼마 되지 않는 1차 노동시장 노동자의 임금은 수술하지만 정작 대다수 노동자의 저임금 구조 해결에는 철저히 침묵하는 셈입니다. 
정부가 말로는 임금 불평등 해소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대기업의 민원 해결에만 나서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정부가 임금체계 개편을 위해 노조 동의를 피해 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 점도 이러한 의혹을 뒷받침합니다. 정부는 ‘사업장 내에서 특정 직군이나 직종 근로자가 자신에게 맞는 근로조건을 결정할 수 있도록 부분 근로자 대표제도를 도입한다’라는 방침을 마련하고, 노조조직률이 높은 대기업이 노조 동의 없이도 임금 체계를 바꿀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물론 기업 내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연공급제에 의해 위 세대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임금을 받는다고 느끼는 청년 노동자들의 불만도 가볍게 볼 순 없습니다. 곽상신 워크인조직혁신연구소 연구실장은 “임금을 결정하는 기준이 이전처럼 근속연수만 가지고 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라면서 “직무의 형태, 일하는 사람의 노동력의 질을 기준으로 임금을 맞춰줘야 하는 것은 맞다고 본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곽 실장은 “(현 정부와 같이) 임금 체계 개편의 방향을 '기업 단위 내부의 문제'로 가져가서는 노동시장 이중 구조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지적합니다.

정부가 말하지 않는 '산별 단위 교섭 체계'

그러면 노동시장의 이중 구조와 노동자 간 임금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어떤 논의가 필요한 걸까요. 시급한 선결과제는 앞서 강조한 것처럼 기업 간의 임금 불평등 해소를 위해 중소기업의 노조조직률을 높이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공정 거래 구조 개선해야 합니다. 임금 격차를 분석한 많은 연구 보고서들의 공통된 결론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기업 단위 내부의 문제에 국한되어 있는 임금체계 논의를 사회적 합의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초기업적인 단위에서 임금체계를 논의하는 교섭 체계가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가치가 구현된다는 것입니다. 임금 체계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낸 선진국에서 시행하는 산별 교섭 모델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2000년대 초반부터 금융노조와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 대학노조 등 산별노조가 생기면서 산별 교섭이 진행돼 왔지만 임금 결정은 여전히 기업단위 교섭에서 이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다 보니 같은 업종 내에서 같은 일을 하면서도 원청이냐 하청이냐에 따라, 기업 단위 노조의 교섭력에 따라 임금의 격차가 심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한 번에 선진국과 같은 사회적 타협을 이루기에 현실적인 난관이 너무 많습니다. 독일 등 서유럽 국가들은 애초에 노조가 산별 단위로 결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보니 산별노조 체계가 잘 갖춰져 있습니다. 사용자 단체도 조직률이 50%를 넘게 나타납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노조 설립 단위가 기업이고 사용자단체도 조직률이 10%대에 불과해서 산별 단위에서 임금 교섭이 이뤄지기는 힘든 실정입니다.
곽상신 연구실장은 “임금체계를 한꺼번에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자동차면 자동차, 철강이면 철강 등 같은 업종들 간에는 노동 형태가 유사하기 때문에 직무가치를 평가해 수당이라도 적절한 공통의 기준을 만드는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산별 단위든 지역 단위든 임금이 결정되는 단위가 기업 외부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양대 노총이 산별로 실질적인 임금을 교섭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산별 노조가 원청 대기업과 하청 기업 간의 임금 격차를 좁히려는 노력을 해주고 이를 통해 하청 기업의 임금이 오르는 만큼 납품단가 현실화가 이뤄지는 선순환이 이뤄지도록 산별 노조가 역할을 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영만 부경대 경제사회연구소 연구교수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산별노조인데 금속노조에 속해 있는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노조는 금속노조의 산별 중앙교섭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라며 “비판받아 마땅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도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다면 개별 기업 내의 임금체계 손보겠다는 현재의 정책 방향을 탈피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합니다. 임금 격차의 핵심이 기업 간의 격차 문제라는 점을 알고, 산별 단위로 임금체계를 갖추는 사용자에게 세제 혜택 등의 인센티브를 내거는 방향으로 정책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23년 2월2일 고용노동부의 상생임금위원회 발족식. 상반기 동안 임금체계 개편을 위한 제도 개선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3월에 발표될 윤석열 정부의 구체적인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 종합대책이 우리 노동 시장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아니면 대기업의 민원 들어주기식에 그칠지 시험대에 올라있습니다.
제작진
인포그래픽김지연
그래픽이도현
출판허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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