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근 의문사와 '알프스 계획'

2021년 03월 30일 16시 11분

1985년 11월 25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1985년 11월 25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재독 동포 김영희 씨에게 서독 외무성이 보낸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5개월 전 한국에 간 아들 안상근(당시 35세)이 사망했다는 통보였다. 사인은 자살. 사망일은 1985년 10월 18일, 숨진 지 이미 38일이나 지난 뒤였다.
안상근 씨는 1985년 6월 26일 독일을 떠나 한국에 왔다. 그는 다음달 15일 국가안전기획부에 자신이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자수했다. 안 씨는 이후 두 달 가까이 영장도 없이 불법 감금돼 조사를 받다가 9월 4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그리고 구속 한 달 보름만에 서울구치소 감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안 씨는 서독 정부에 망명을 신청해 영주권을 취득한 독일 영주권자였다. 한국 외무부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안 씨의 죽음을 서독 정부와 현지 가족에게 어떻게 알릴 것인가를 두고 외무부와 법무부·검찰, 그리고 서독 외교관 사이에 긴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외교부는 29일 안상근 씨 의문사 사건을 둘러싼 외교문서 400여 쪽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의 죽음을 은폐하는 과정과 그 배경이 30여 년만에 드러났다. 

1985년 10월 18일, 서울구치소

1985년 10월 18일,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9월 4일 구속됐다가 10월 4일 기소된 재독  동포 안상근 씨가 서울구치소 감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인을 조사한 당국은 안 씨가 감방 안에서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고 결론 내렸다. 
사망 조사보고서에는 안 씨가 젖은 수건 2장으로 감방 출입문 시찰구 창틀에 목을 맨 것으로 기재돼 있다. 수건을 걸었다는 시찰구 쇠 창틀 하단에서 바닥까지 높이는 102cm. 안상근 씨의 키는 175cm였다.
▲ 3월 29일 공개된 외교문서 ‘안상근 재독일 반한 동포 간첩사건' 보고서에 첨부된 현장 사진(좌)과 현장 상황도(우). 사망조사보고서에는 ‘양다리를 앞으로 뻗고 목을 매고 앉았을 때 바닥에서 20cm 가량 뜬 채로 매달려 사망'이라고 기재돼 있다.
▲ 1985년 9월 10일 조선일보 1면 ‘학원침투 유학생 간첩단 검거'

1985년 9월 9일, 국가안전기획부

1985년 9월 9일 안기부는 보안사와 함께 학원에 침투한 유학생 간첩단 2개 조직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다음날 언론은 ‘북괴 대남 공작 운동권과 연계', ‘제2의 광주사태 획책' 등의 제목을 달아 이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미국과 서독에 유학중 북에 포섭되어 국내에 잠입, 활동 중이던 학원 침투 간첩 2개 간첩망 22명을 검거, 이중 19명을 구속하고 3명을 불구속 송치했다”는 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안기부가 발표한 서독 유학생 간첩 학원침투 사건 조직도에 바로 안상근의 이름이 들어있다. 이름 앞에는 ‘입북 간첩’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 1985년 9월 10일 조선일보 10면 ‘학원침투 유학생 간첩 2개 간첩망 조직도'
1985년 6월 27일 한국에 들어온 안상근 씨는 독일에 체류할 당시 이00 씨와 함께 동백림(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을 접촉하고 북한에 다녀온 적이 있다는 사실을 국가안전기획부에 자수했다. 입국 후 18일째인 7월 15일이었다. 조사 과정에서 안 씨는 북한 방문 사실은 있지만 간첩은 아니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서울지방검찰청 조사에서 “한국에 입국한 것은 북괴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라 순전히 본인 혼자 생각으로 들어온 것이며, 북괴의 지시에 따라 입국했다는 것은 안기부 직원의 강요에 의해 할 수 없이 기재한 것"이라고 검사에게 진술했다. 
그는 또 “제가 이미 자수할 결심 하에 입국한 마당에 무엇 하러 북괴에 보고하려고 그러한 것을 염두에 두었겠습니까. 제가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일부러 돌아다니며 더 적극적으로 탐지를 하였을 겁니다.”라며 북한의 지령을 받거나 국가 시설을 탐지하였다는 혐의는 안기부 수사관들의 강압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조작된 것이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담당 검사는 이를 무시하고 안상근 씨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1985년 2월 3일 모스크바를 경유해 북한에 가서 간첩 교육을 받고, 지령 수행 목적으로 한국에 들어왔다는 죄목(잠입)이었다.

1985년 11월 4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안상근 씨의 어머니 김영희 씨는 아들이 숨진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단지 공안 사건으로 구속됐다는 사실만 알고 아들 구명에 동분서주했다. 1985년 11월 4일, 독일 녹색당과 함께 아들에 대한 변호 지원을 계획하고 있음을 주한 독일대사관에 알렸다. 이에 따라 아들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주소와 한국 내 변호인 선임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등을 문의했다.

1985년 11월 12일, 서울 외무부

안상근 씨 사망 사실을 유족인 김영희 씨와 서독 정부에 한 달 가까이 알리지 않았던 대한민국 외무부는 다급해졌다. 서독 정부에 정치 망명을 신청해 영주권을 취득했기 때문에 서독 영주권자 신분이었던 안상근의 죽음이 양국 간 외교 문제로 비화될 것을 외무부는 우려했다. 85년 11월 12일 외무부의 ‘안상근 현황에 대한 서울지검 통보 내용'이라는 문서에 따르면 백낙환 외무부 서구 1과장과 이사철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는 11월 5일부터 11일 사이 대책 마련을 위해 수차례 통화했다.
▲ 1985년 11월 12일 한국 외무부가 작성해 보고한 ‘안상근 현황에 대한 서울지검 통보 내용’, 작성 당일 오후 4시 40분 당시 전두환 청와대 정무비서관 이정빈에게 보고됐다.
외무부는 안상근 사망 사실을 공개해 서독 정부의 관련 자료 요청 등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대내외적 사태에 대비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또 이를 검찰총장에게 세 차례에 걸쳐 건의했으나 법무부는 ‘사건 처리'의 관점에서 동건을 종료하며, 이를 발표치 않는다는 입장을 계속 견지하고자 했다. 외무부는 법무부장관의 대책을 공문으로 요청했다.

1985년 11월 13일, 서울 외무부 구주국

외무부는 이 사건이 야기할 문제점을 자체 검토했다. 첫째, 사건 은폐가 힘들고 국내 차원의 처리가 사실상 불가능하며, 한독 양국 간의 중대한 외교적 분쟁으로 발전할 소지가 있다. 둘째, 사건이 폭로될 경우 사건 은폐 배경에 관한 의혹이 국제적으로 고조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세계 언론에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정부는 방어적 입장에서 변명해야 하는 어려움을 감수해야 할 것이고 이 경우 5공화국 수립 이후 수차에 걸쳐 사면, 복권 등으로 이룩한 개방적, 자유주의적 이미지는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셋째, 사망 사실 공표 시기가 빠를수록 내년도 ‘알프스 행사’에 미치는 영향을 극소화할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있는 반면, 사실을 뒤늦게 발표하거나 사건이 폭로될 경우 알프스 계획 추진에 심대한 지장이 초래된다. 이상이 외무부의 판단이었다. 이른바 ‘알프스 계획'이란 전두환의 유럽 순방 관련 계획을 일컫는 것이다. 당시 방문 계획이 확정된 영국과 독일, 프랑스 등 3국을 모두 의전의 격이 가장 높은 ‘국빈방문'으로 추진한다는 일종의 프로젝트 명이었다.
▲ 1985년 11월 13일 외무부가 작성한 ‘(안상근 사망) 동 사건이 야기할 문제점 검토’ 
결국 외무부가 세운 대책은 독일 정부 측에 사건 전말에 대한 적절한 해명과 대한민국 정부의 조치사항을 시급히 알려 독일정부가 자국 내 비난 여론을 무마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자는 것이었다. 이 대책의 목적은 ‘인권’ 보다는 외교적 분쟁 차단과 차질 없는 ‘알프스 계획’ 진행을 위해서였다.

1985년 11월 19일, 서울 

법무부의 반대가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외무부는 안상근 사망 사건을 서독 정부에 알리기로 결정했다. 1985년 11월 19일 오전 10시 30분 당시 외무부 차관 이상옥(당시 장관 대리)은 주한 독일 대사에게 ‘금일 오후에 주한 서독 대사를 만나 안상근 사건을 설명할 예정’이라며, 사건 처리 관련 설명 자료를 영문으로 발송했다. 이 외교문서엔 매우 특이한 대목이 한 줄 들어 있다. ‘동건 관련, 국내보도는 없을 것임을 참고 바란다'라는 내용이다. 한국 내에선 공식 발표 없이 계속 비밀로 붙이겠다는 것이다.
▲ 1985년 11월 19일, 외무부가 주한 독일대사에게 발송한 ‘안상근 사건 처리'라는 제목의 외교전문
이날 오후 5시 30분, 외무부 한우석 제1차관보가 클라이너(Kleiner) 주한 서독대사를 만나 상황을 설명했다. 
외무부가 남긴 면담 요록만 보면 서독대사는 면담의 목적과 한국 정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동 사건이 나쁜 파급효과를 가져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으며, 본국 정부도 동건이 정치 문제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함. 독일 언론 기관들이 이를 악의로 왜곡, 과장 보도를 할 가능성이 농후하며, 녹색당이 연방 하원에서 동 문제를 제기할 경우 정부로서도 해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임. 동백림 사건이 아직도 완전히 잊히지 않은 상태에서 악의적인 추측 보도를 할 수 있는 재료가 될 것으로 우려됨. 가능한한 왜곡 과정 보도되는 것을 예방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본국 정부에 즉각 건의하겠음.”

클라이너(Kleiner) 주한 서독 대사  

1985년 11월 21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내에서는 아무 일 없이 넘어가는 듯했으나 안상근의 사망 소식을 접한 서독 정부는 매우 당황했다. 1985년 11월 21일 저녁 7시 50분 주독일 한국대사는 본국 외무부 장관에게 독일 외무성 정무차관보의 안상근 사망 사건 관련 언급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불가사의(MYSTERIOUS)한 안상근 사건에 대하여 서독 정부로서는 매우 당황하고 유감스럽게 생각함. 한국 정부가 사망 1개월 후에나 안상근이 자살하였다고 알려준 것은 극히 놀랍고 유감스러운 일임. 외무성으로서 더욱 난처한 것은 IMF 총회 시 방한하였던 녹색당의 Muller 의원이 수일 전 의회에서 질문을 통해 안상근의 서독 귀환에 대한 외무성의 조치 등을 문의하여 외무성으로서는 그때까지 한국 정부가 이야기한 것만을 믿고 그것을 토대로 답변하였는 바, 지금에 와보니 그때는 이미 안상근이 죽은 후 오래된 시점으로서 결과적으로 외무성이 의회에 대하여 위증한 것이 되었는 바, 이점 매우 불쾌하게 생각함.”

SUDHOFF 독일 외무성 정무차관보

1985년 12월 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1985년 12월 2일 저녁 8시, 주 프랑크프루트 한국총영사는 본국 외무부 장관에게  안상근의 어머니 김영희를 1시간 30분가량 만났다고 보고했다. 김영희의 자택으로 예고 없이 방문했으며 고급 ‘싼키스트 오렌지’ 한 상자를 사들고 방문했다고 덧붙였다. 총영사는 김영희가 아들이 한국에 자진 귀국했다는 것과 자살 사실을 믿지 못하며 “망명 여권을 가지고 다른 나라는 다 갈 수 있지만 한국만은 못 간다는 것을 아는 처지에서 한국에 갔다는 사실을 비롯하여 자기가 겪은 정보 정치의 경험과 금번 늦게 통보해 준 사실 등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볼 때 자기 아들은 처음부터 유인되어 간 것이고 고문 치사 당한 것이 틀림없다”라고 거듭 주장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 1985년 12월 2일 주 프랑크푸르트 한국총영사가 본국에 보낸 ‘안상근 모 면담' 보고서

2009년 5월 1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안상근 씨가 숨지고 20여 년이 지난 2009년 5월 11일,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가 피해자를 장기간 불법구금하고 구타, 가혹행위 등 강압적 수사로 허위자백을 받아내 간첩죄 등으로 범죄사실을 조작한 것을 확인했다며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위원회는 또 피해자와 유가족의 피해 및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현재, 대한민국

이번에 공개된 안상근 관련 문서철 ‘안상근 재독일 반한 동포 간첩사건, 1985-87' 4백여 페이지 가운데 일부는 ‘공란’으로 처리돼 내용을 알 수 없다.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사건의 일부는 아직도 장막에 가려져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안상근 씨의 자살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자살의 동기를 추정할 뿐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안상근 씨가 구치소 수용자 생활용품 급여 지침과 맞지 않게 목을 매는데 사용한 수건 2장을 어떻게 소지하게 됐는지도 설명하지 못했다. 고 안상근 씨는 검찰 조사 당시 간첩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담당 검사는 훗날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낸 이사철이다. 
자살의 진위 여부를 떠나, 안기부와 언론에 의해 대대적으로 북괴 간첩이라고 규정된 안상근이 재판에 나와 고문과 강압에 의해 허위 진술을 했다고 폭로하는 것은 당시 정부로서는 두려운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비밀해제된 외교 문서의 마지막 장은 ‘안상근 사건 개요'라는 제목의 문건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아측은 독일 측의 질의 사항에 대하여 성실히 설명자료를 제시함으로써 독일정부는 사건 개요를 이해하고 동건을 원만히 수습한 상태. 알프스 행사와 관련해서도 행사 분위기를 위하여 사전 노력 - 아측의 신속하고 적극적인 협조에 사의 표명'이라고 평가했다. 
고 안상근의 죽음을 둘러싼 429 페이지 분량의 대한민국 외교문서에는 그 어디에도 ‘인권'은 없었다. ‘간첩'이라는 낙인이 찍힌 정치 망명자의 죽음은 군사독재정권에는 외교적 걸림돌일 뿐이었다.
▲2021년 공개 외교부 문서철 ‘안상근 재독일 반한 동포 간첩사건, 1985-87' 마지막 페이지
제작진
디자인이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