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타파] "나는 코레일에 서울역 시계탑을 빼앗겼다"

2019년 08월 05일 08시 00분

<편집자주>
뉴스타파는 지난해 12월 현대중공업을 시작으로 대기업 갑질 사례를 ‘갑질타파’라는 시리즈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공정위 등 감독 당국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취재하고 있습니다. 현대중공업, 롯데그룹, 현대차그룹에 이은 갑질타파 네 번째 기업은 공기업 코레일입니다.

기차역 광장에서 만남의 이정표 역할을 해온 시계탑. 국내에는 1971년에 처음으로 기차역에 시계탑이 설치됐다. 이 시계탑을 처음 만든 업체는 ‘철도방송’이라는 이름의 작은 중소기업이다.

철도방송은 1971년 국내 최초로 전국 26개 역에 시계탑을 설치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장영선(59) 철도방송 대표는 아버지가 세운 기업을 이어받아 1989년부터 업체를 운영해왔다. 1988년 창간돼 새마을호에 비치됐던 국내 첫 열차 기내지 <레일로드>도 철도방송이 발행한 잡지다. 철도방송은 70~80년 대 열차와 역사 안에서 나오는 방송을 제작해 회사 이름이 아직까지 철도방송으로 남아 있다.

▲국내에 처음으로 기차역에 시계탑을 세운 업체는 ‘철도방송’이라는 중소기업이다. 1988년 서울역 앞에 설치된 서울역 시계탑의 모습. (철도방송 제공)

2004년 KTX 고속철도역사가 신축됐다. 이듬해 서울역 광장에 새로 세워진 시계탑도 장영선 철도방송 대표가 만들었다. 설립 당시에는 장구 모양의 기둥 사이에 에밀레종이 달려 있었다. 매시 정각마다 에밀레종 종소리가 울렸다. 장 대표는 “외국인이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 볼 수 있는 우리나라의 심벌이길 바랐다”고 말했다. 외부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의뢰해 디자인 비용만 1천만 원 가량이 들었다. 제작에서 설치까지 들어간 비용만 5천만 원 가량이었다. 특허청으로부터 디자인등록도 받았다.

▲2017년 6월 당시 서울역 시계탑 모습과 올해 7월 서울역 시계탑 모습. 2017년까지만 해도 철도방송이 제작했던 에밀레종이 달려 있었다. 현재는 광고판으로 대체됐다.

2004년 KTX가 개통되기 전에도 철도방송은 기차역 내의 여러 시계를 운영하고 있었다. 시계 옆에 광고를 붙여 기업으로부터 광고료를 받고, 코레일 측에는 계약에 따른 이용료를 내는 구조다. 그런데 KTX 역사 공사 과정에서 코레일 측은 시계를 구역사에서 임시 역사, 임시 승강장으로 옮겨달라고 요구했다. 이전 비용은 모두 철도방송이 부담했다. KTX 역사가 들어서고 철도방송은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서울역을 비롯한 전국 8개 KTX 역사에 디지털시계를 90여 개 설치했다. 3억 6천여 만원이 들어갔다. 역시 특허청에서 디자인등록을 받았다.

▲2004년 철도방송이 서울역에 설치한 디지털시계. 해당 매체는 특허청으로부터 디자인등록을 받았다.

코레일에 ‘무상 기증 당한’ 시계탑과 시계들  

2007년 철도방송은 날벼락 같은 통보를 받게 된다. 코레일 측에 계약 연장을 요구했더니 ‘먼저 계약 사항을 이행하라’는 요구를 받은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시계탑과 시계를 코레일에 무상 기증하라는 요구였다. 계약서에는 어떤 조항이 있었던 것일까.  

2004년 6월에 체결된 ‘고속철도역 시계이용 광고매체 광고대행 계약서’에는 ‘계약체결과 동시에 을(철도방송)이 설치한 시계이용광고 등 광고 표출설비는 갑(철도청)에 무상으로 기증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계약 체결 당시 철도방송 측에서는 이 조항에 대해 문제를 삼았다고 한다. 장 대표는 “말도 안 되는 조항이 들어가 있어서 이게 뭐냐고 했더니 (코레일 측에서) 표준계약서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며 “믿고 도장을 찍었는데 3년 있다가 계약 사항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공문을 보내왔다”고 말했다.

▲2004년 철도방송이 KTX 고속철도역에 디지털시계를 설치하면서 코레일 측과 체결한 계약서의 17조 조항. 설치와 동시에 철도청에 무상 기증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철도방송은 계약 연장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시계탑과 디지털시계 등을 무상으로 기증한다는 기증서를 코레일에 제출했다. 그렇게 시계탑과 디지털시계들은 3년 만에 코레일의 소유가 됐다. 그리고 2010년 12월 계약 기간이 종료됐다.

이제 철도방송은 ‘코레일 소유’가 된 시계들을 이용해 사업을 하려면 코레일과 다시 계약을 맺어야 했다. 철도방송 장영선 대표는 코레일과 수의계약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시계탑과 디지털시계 모두 철도방송 측에서 제작과 설치를 했고 특허까지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코레일 측은 공개 입찰을 진행했다.

코레일 관계자는 당시 공개 입찰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대해, 2010년 감사원에서 지적재산권을 갖고 있는 업체와 코레일이 수의계약을 한 사례를 지적받았기 때문에 공개 입찰을 해야만하는 상황이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취재진이 2010년 감사원 감사 자료를 확인해 보니, 당시 지적을 받은 업체는 실용신안권 존속기간(10년) 만료일이  7개월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3년 수의계약을 승인받은 사례였다.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26조에 따르면 특허를 받았거나 실용신안등록 또는 디자인등록이 된 물품을 제조할 경우 수의계약이 가능하다. 따라서 철도방송은 수의계약으로 계약 연장이 가능할 수도 있었지만 코레일 측에서 공개 입찰을 고집한 셈이다.

공정위, “무상 기증 계약 조항은 무효”

결국 철도방송은 코레일과의 거래 관계를 끊었다. 그리고 싸움을 시작했다. 2012년 공정거래위원회에 무상기증 조항에 대해 불공정 약관 심사를 청구했다. 공정위는 2013년 ‘설치와 동시에 코레일에 광고매체를 기증하는 조항은 불공정한 약관으로 무효’라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공정위는 약관 심사 과정에서 코레일유통이 해당 위반 약관을 시정했다는 이유로 심의를 종료했다.

철도방송은 힘겹게 공정위에서 불공정 약관이라는 결정을 받았지만 현실은 달라진 게 없었다. 코레일 측은 해당 무상기증 약관이 무효 판정을 받았다 하더라도 공정위의 시정 요구 이전에 체결한 계약에 따른 무상기증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입장이다. 허연석 코레일유통 광고사업처장은 “공정위 결정 이전에 체결한 계약에 따른 무상기부는 여전히 유효하며 배상할 의무가 없다는 내부 법률 자문을 받았다”며 “철도방송이 배상 요구를 공식적으로 해온다면 채무부존재 소송을 통해 법적 판단을 받아보겠다”고 말했다.

약관은 무효지만 ‘보상 받으려면 소송하자’는 코레일

하지만 약관이 무효인 만큼 해당 약관에 따른 무상기증 행위 자체도 무효가 된다는 해석도 있다. 박준철 변호사(민변 민생경제위원회)는 “공정위의 결정은 해당 약관이 계약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하기 때문에 무효라는 것”이라며 “무효인 약관 규정에 따라 이뤄진 철도방송의 소유권 이전 행위 자체도 당연히 무효”라고 말했다.

장영선 대표는 “갑질이 발생했을 때 감사원, 공정위 같이 국민이 호소할 수 있는 곳에 호소를 했는데 거기서 어느 정도 조정이 돼야지 사법적 판단 외에 자기들은 응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제2의 갑질”이라며 “사법부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여건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갑질도 안 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영선 대표는 지난해 국민권익위원회에 기업고충민원팀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민원을 제기했다. 국민권익위가 철도방송과 코레일유통 간에 조정을 맡았지만 1차 조정은 불발됐다. 코레일유통이 최종적으로 법적 판단을 받아야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서울역 시계탑은 지금도 역 광장에 서 있다. 시계탑 가운데 설치됐던 에밀레종은 광고탑으로 대체됐다. 광고 사업은 다른 업체에서 운영하고 있다. 철도방송 장영선 대표는 아직도 가끔 서울역을 찾는다. 절대 기차는 타지 않지만 시계탑을 보기 위해서다.

취재: 조현미
촬영: 김기철
편집: 박서영
CG: 정동우
디자인: 이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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