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한 대한민국 소비자] 1. 집단소송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

2022년 09월 07일 14시 00분

21세기 기업은 국경을 뛰어넘어 세계에서 돈을 벌어 들이지만, 소비자는 자신이 사는 나라의 법률과 법원을 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사법제도는 삼성, 애플, 폭스바겐, 옥시 같은 글로벌 기업에 유난히 유리합니다. 이들 회사가 휴대전화의 성능을 속이고 엉터리 살균제를 만들어도 한국 소비자는 좀처럼 배상받기 어렵습니다. 다른 나라 소비자는 한국의 수천 배 넘는 배상을 받습니다. 한국에는 없는 집단소송(Class Action)제도가 있어서입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기업은 더욱 부도덕해지고, 소비자는 더욱 불리해집니다. 글로벌 기업 시대, 한국의 소비자 권리를 5회에 걸쳐 살펴봅니다. 한국에서 집단소송이란 표현이 종종 쓰이지만 사실은 원고가 많은 ‘대규모 소송’을 가리킬 뿐입니다.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번 시리즈에서는 집단소송 대신 불가피하게 ‘클래스 액션’이란 미국식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편집자 주>
1. 집단소송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
한국에는 집단소송 제도가 없다. 증권 분야에 한정해 2005년 집단소송이 도입됐지만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껏 제기된 증권 관련 집단소송은 10건이다. 더구나 2016년 이후에는 제기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언론은 집단소송이 제기됐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런 기사들은 원고가 많은 대규모 소송을 잘못 일컫는 것이다. 집단소송은 대규모로 피해가 발생한 사건에서 몇 사람이 대표가 되어 소송하고, 승소하면 모든 피해자에게 같은 배상을 하는 제도다. 
이렇게 시민이 기업에 배상을 집단적으로 요구하는 제도가 없는 나라에서는 기업이 부정행위를 저지르는데 부담이 적다. 기업이 집단을 상대로 손해를 끼치는 경우, 기업이 얻는 이익은 막대하지만 소비자 개개인의 손해는 크지 않다. 이럴 때 개인들은 비용이 들고 절차도 복잡한 소송에 참여하기 어렵다. 더러 언론에 대규모 소송이 제기됐다고도 보도되지만 그때뿐이다. 정말 소송에 참여하는 사람은 적고, 재판 과정을 모두 기다려 판결을 받는 사람은 더 적다. 집단소송이 있었다면 소비자는 지금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소송을 벌일 수 있다. 
한국에서 기업은 아무리 커다란 잘못을 저질러도 소비자에게 제대로 배상하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는 누구나 잠재적인 피해자가 된다. 기업으로서는 불법을 저지르거나 방관하는 게 이익이기 때문이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베엠베(BMW) 차량 화재, 홈플러스 고객정보 불법판매, 카드사 고객 개인정보 유출(KB국민카드·NH농협카드·롯데카드), 사모펀드 불완전·사기 판매, 5G 이동통신서비스 불통(SK텔레콤·KT·LG유플러스) 문제 등에서 기업들이 아무런 배상도 하지 않거나 아주 적은 금액을 물고 말았다. 
법무법인 한누리 관계자들이 2018년 애플 코리아를 상대로 하는 손해배상청구 소장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내고 있다. 이날 제출한 원고 명단은 6만여 명이지만 복잡한 절차 때문에 현재 9000여 명으로 줄었다. ‘클래스 액션’ 제도가 있는 나라에서는 대표 피해자를 뽑아 소송을 진행한다. (출처:연합뉴스)

소비자를 속인 애플의 아이폰 배터리 게이트

애플은 2016년 9월 운영체제 iOS 10.1.1를 발표하고 기존 아이폰 등에서 업데이트 되도록 했다. 그런데 배터리가 이상하다는 문제를 아이폰 6과 아이폰 6S 모델을 쓰는 사용자들이 제기했다. 배터리 용량이 30% 언저리가 되면 핸드폰이 갑자기 꺼진다고 했다. 이 문제에 대해 애플은 배터리 결함을 일부 아이폰 6S 모델에서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기기 안에 있는 전자 부품을 보호하기 위해 셧다운이 되는 현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음 iOS 업데이트에서 배터리 성능 및 셧다운 작업을 관리하는 알고리즘을 개선하겠다”고 했다.
애플은 이듬해인 2017년 2월, 갑자기 휴대전화가 꺼지는 운영체제 iOS 10.1.1의 다음 버전인 iOS 10.2.1 내놓았다. 그러면서 “예상치 못한 셧다운을 줄였다. 셧다운이 줄어든 비율은 아이폰 6S에서 80% 이상, 아이폰 6에서 70%”라고 했다. 하지만 배터리 꺼짐을 해결한 방법이 사실은 아이폰 기기의 성능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리는 방식이란 사실이 같은 해 12월 드러났다. 새로운 iOS인 10.2.1로 업그레이드된 아이폰 6 모델, 업그레이드된 iOS 11.2로 운영되는 아이폰 7 모델의 기기 성능이 떨어진 데이터를 보여주는 보고서가 발표되면서다. 이러한 증거는 벤치마킹(전자기기의 연산성능을 시험해 수치화하는 것) 도구인 긱벤치(Geekbench) 사용자들이 내놓았다.
사용자들의 주장은 애플의 시인으로 사실로 확인된다. 애플은 “시스템 안정성을 유지하고 예기치 못한 셧다운을 방지하기 위해 구형 아이폰 기기에 배터리 상태에 따른 소프트웨어 성능 제어를 구현한 사실이 있습니다”라고 전자제품 평가 웹사이트 CNET에 밝혔다. 다시 말해, 배터리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 기기의 성능을 떨어뜨리는 수법으로 마치 결함이 해결된 것처럼 소비자를 속인 것이었다.
얼마 후 애플은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갑자기 꺼지는 현상을 막으려고 프로세스 성능을 제한했다고 했다. 배터리 수명이 짧아진 아이폰 성능을 의도적으로 낮춘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소비자가 새로운 제품을 사도록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애플 제품의 수명을 단축하거나 기기의 성능을 저하한 적은 결코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배터리 교체 비용을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애플은 2018년 1월부터 12월까지 아이폰 6과 6S의 배터리 교체를 하면 50달러를 할인(79달러에서 29달러로)해 준다고 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조정위원회 김이수 위원장이 지난 4월 서울 종로구 변호사회관에서 경과보고를 하고 있다. 위원회는 최종 조정안을 거부한 옥시레킷벤키저와 애경산업에 유감을 표했다. 미국과 같은 클래스 액션 제도가 있었다면, 이 기업들이 이렇게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사법 분야 관계자들은 얘기하고 있다. (출처:연합뉴스) 

미국에서는 천문학적 배상, 한국에서는 여전히 진척 없어

이렇게 애플이 소비자를 속인 사실이 드러나자 미국에서는 곧바로 ‘클래스 액션’이 제기됐다. 아이폰 6와 6S 등 사용자들이 제기한 클래스 액션이 한 달 만인 2018년 1월 이미 32건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2년이 채 못 되어서인 2020년 3월에 클래스 액션이 마무리됐다. 애플은 3.1억 달러(4185억원, 1달러 1350원 기준)~5억 달러(6750억원)를 배상하게 됐다. 아이폰 한 대당 25달러(3만 3750원)에 해당하는 규모다. 대상은 아이폰 6, 6 Plus, 6s, 6s Plus, 7, 7 Plus, SE. 한편 클래스 액션 대표 소송자로 이름을 올린 원고는 1500달러(203만원), 증거를 제시한 원고는 3500달러(473만원)를 받았다. 변호사들은 변호사 비용으로 150만 달러(20억원)를 받았다.
똑같이 애플 아이폰이 팔리는 한국이지만 소송은 지지부진한 상황이고 결과도 장담하기 어렵다. 미국 등과 달리 제조물에 대한 클래스 액션 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애플의 이른바 ‘배터리 게이트’ 국내 피해자는 1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처음 소송 의사를 밝힌 사람도 42만 명에 이른다. 하지만 클래스 액션 제도가 없어 대규모 원고를 꾸려 소송을 해야 했는데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었다. 변호사에게 위임서류를 내달라고 하니 6만여 명으로 줄었다. 위임서류를 제출한 원고 명단을 정리한 서류만도 6000여 쪽이다. 이 사건을 맡은 로펌은 휴대전화 인증으로 본인확인을 마쳤는데, 법원은 인감증명서를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원고는 다시 9000여 명으로 줄었고 재판은 중단된 상태다. 시민단체가 애플을 고소한 사건의 수사 결과를 보겠다는 이유였다.
이와 관련해 시민단체 소비자주권시민회의는 2018년 애플을 업무방해죄, 재물손괴죄 등의 혐의로 고발했다. 하지만 수사당국은 지난 1월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그러자 경찰에 팀 쿡 애플 CEO와 다니엘 디시코 애플코리아 대표이사를 정보통신망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고발했지만 지난 4월 불송치 결정이 내려졌다. 근본적으로 이런 사건을 범죄로 처벌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법조인들은 설명한다. 이제 민사사건이 시작되겠지만 원고는 전체 소비자의 100분의 1에 불과하고, 그나마 얼마나 배상받을지도 불확실하다.
경제법 분야에 정통한 한 전직 대법관은 “한국에서는 기업이 소비자를 속이고 불법행위를 저지르는 게 남는 장사다. 클래스 액션을 비롯한 제도 도입을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판사 출신인 박혜진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부에서는 기업의 잘못을 국가기관이 적발해 과징금을 물리는 행정규제만으로도 충분한데 민사소송인 클래스 액션까지 필요하냐고 한다”면서 “하지만 요즘처럼 소비자가 훨씬 광범위하게 기업의 불법행위를 발견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클래스 액션을 비롯한 민사소송이, 조사 대상과 처벌 대상을 제한된 인력으로 선택하는 국가의 행정규제를 보완할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작진
디자인이도현
웹출판허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