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에서 오월을 보다

2014년 08월 14일 21시 47분

홍성담 화백 인터뷰, “소독된 표현의 자유를 거부한다”

광주 비엔날레 특별전에서 논란이 된 <세월오월>을 그린 홍성담 화백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직후 진도항으로 달려갔다. 자신의 화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똑똑하고 이쁘고 그림을 좋아했던” 단원고 학생을 찾기 위해서였다. 홍 화백은 수학여행을 간다는 학생에게 아르바이트 급여에 용돈 5만 원을 더 얹어줬다. 그 여학생은 수색 사흘 만에 시신으로 인양됐다. 학생의 얼굴에는 옅은 화장기가 가시지 않았었다고 홍 화백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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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오월, 2014

80년 광주에서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홍 화백은 닷새 동안 진도에 머물면서 광주의 오월을 떠올렸다. “아이들과 승객들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물고문해 숨지게 한 대학살”이라고 홍 화백은 입술을 떨었다. 80년 광주 때 신군부세력이 시민들을 학살했다면, 2014년 진도에서는 “최소비용과 최대이익을 추구하는 천박한 자본주의와 부패한 관료, 무능력한 정권이 빚은 학살”이 벌어졌다는 게 홍 화백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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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조, 어머니 고향의 푸른 바다가 보여요, 1996

진도 체육관을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을 본 홍 화백은 “그 가증스러운 무능력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세월오월>에 나온 박근혜 허수아비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그림은 결국 전시가 불허됐다. “이 정도의 풍자도 허락하지 않을 만큼 국가 시스템이 허약하다”는 뜻이라고 홍 화백은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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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든타임-닥터 최인혁, 갓 태어난 각하에게 거수경례하다, 2012

민중미술 1세대로 불리는 홍 화백은 “또 다른 광주, 또 다른 국가폭력과 싸우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말한다. 가끔은 아름다운 꽃도, 아름다운 풍경도 그리고도 싶지만 “5월 광주에서 죽은 동지들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운명을 피하지 않을 것”이라고 홍 화백은 담담하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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