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평등 국회 ②진전없는 '여성 안전'...국회는 없었다

Feb. 29, 2024, 08:00 PM.

21대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여성 관련 법안의 통과율은 1.9%다. 뉴스타파가 집계한 전체 여성 관련 법안 1486건 중 29건 만이 통과됐다. 물론 국회의원들이 발의안 법안 중 원안 및 수정 가결된 법안만 보수적으로 집계한 수치다. 다른 의원이나 정부안에 대안으로 반영돼 폐기된 법안은 빠져있다. 그렇다고 해도 똑같은 방법으로 집계한 전체 법안 통과율 5.13%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청년 관련 법안 통과율 2.4%보다도 낮다. 
국회에는 1.9%의 숫자 속에 담기지 못하고 곧 사라질 위기에 놓인 법안이 무수히 많다. 그중에는 여성의 생명, 안전과 직결된 법안도 다수 있다. ‘비동의 강간죄’ 법안이라고 불리는 성폭력 관련 법안, 임신 중지(낙태) 관련 법안이 대표적이다. 뉴스타파가 만난 여성들은 “국회가 여성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무시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여야 의원 모두 발의했던 그 법, ‘비동의 강간죄’

“안녕하세요. 저는 준강간 피해 생존자 박겨울입니다.”
30대 여성 박겨울(가명) 씨는 자신을 ‘강간, 준강간 피해 생존자’라고 표현했다. 죽고 싶을 만큼 끔찍한 사건에서 가까스로 살아 남았다는 뜻이다. 박겨울 씨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2017년 5월 5일 새벽, 서울 마포구의 한 클럽에 갔던 박겨울 씨는 친구들을 기다리다가 처음 만난 남성들과 동석한 자리에서 술을 한 두 모금 같이 마셨다. 그 뒤로 기억을 잃었다. 한참 뒤에 눈을 떠보니 김포의 한 모텔 안이었다. 그 장소에는 한 남성이 같이 있었다. 이 남성은 겨울 씨가 정신을 차리자 강제로 성관계를 시도했다. 겨울 씨는 싫다며 강하게 저항했지만, 남성이 누르는 힘을 이겨내지 못 했다. 그 전날에도 남성이 자신이 기억을 잃었을 때, 성관계를 시도했다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겨울 씨는 강간, 준강간 피해자가 됐다. 하지만 겨울 씨는 법적으로 강간 피해자로 인정 받지 못했다. 경찰에 남성을 신고했지만,  사건을 넘겨 받은 검찰은 불기소 처분했다. 수사기관이 확보한 CCTV에는 명확하게 겨울 씨가 항거 불능 상태에서 남성들에게 끌려가는 장면이 있었지만, 강간으로 볼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게 검찰의 불기소 이유다.  
몸을 전혀 가누지 못한 채 90도로 꺾여 있는 박겨울 씨 모습. 박 씨는 서울 마포구에서 이 남성들과 술을 마신 뒤 정신을 잃었고, 그 후로 30분 가량 떨어진 김포의 모텔로 끌려왔다. 사진은 2017년 5월 5일 성폭력 피해 당일 김포의 모텔 CCTV화면
형법 297조(강간)에 따르면,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이 있는 강간이어야 처벌할 수 있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폭행, 협박은 피해자가 현저히 항거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폭행을 말한다. 즉, 검찰은 겨울 씨가 현저히 항거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이 아니었다고 보고, 남성에게 무혐의 처분을 한 것이다. 
겨울 씨는 검찰의 불기소에 법원에 재정 신청을 했다. 법원은 강간을 제외하고 준강간 미수 혐의에 대해 재판을 진행했다. 법원도 폭행과 협박이 없는 강간은 처벌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6년 간의 재판 결과, 법원은 2023년 4월 준간강 미수 혐의에도 무죄를 선고했다. 
박겨울 씨는 “내가 정신을 잃고 남성들에게 끌려가는 명백한 CCTV 증거영상이 있어도 법원은 강간도, 준강간미수 피해도 인정하지 않았다”며 “강간을 피하려고 할 수 있는 만큼 저항하고 또 저항했다. 그러다 더 나쁜 상황이 닥칠까 봐 결국 반항을 포기한 건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때 맞았어야 했나, 그랬으면 달랐을까, 하는 후회가 된다”고 말했다. 
이런 사례는 겨울 씨만이 아니다. 2022년 전국성폭력상담소 협의회 통계를 보면 전체 강간 피해 상담 사례 4765여 건 중 직접적인 폭행과 협박이 없는 강간 피해가 62.5%(2979건)나 된다. 
70~80%의 가해자들은 명시적인 폭행 협박이 아니라 다른 힘들을 이용을 하는 거거든요. 내가 어떤 사회적 자원이 있고 어떤 힘이 있는지를 계속 과시하거나 암시하거나 그걸 지속적으로 피해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줘서 사실상 그루밍(심리적 지배) 상태에 놓이게 한다든지, 아니면 어떤 금전적인 속박이라든지, 그리고 모르는 사람의 경우에도 피해자는 내가 여기에 어떤 저항을 한다든가 할 경우에 내가 아예 목숨을 잃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든지. 이런 것들 때문에 (피해자 중) 명시적 폭행 협박이 없는 경우가 대대수인데, 지금의 강간죄 법조항은 이런 피해 여성을 지켜줄 수 없는 거죠.

(김혜정 /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21대 국회에는 겨울 씨와 같은 피해자를 위한 법안이 3건 발의돼 있다. 일 ‘비동의 강간죄’ 법안이다. 1953년 제정된 강간죄의 처벌 기준을 현실에 맞게 폭행 또는 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확대하는 법안이다. 
하지만 이 법안은 발의 이후 제대로 논의도 되지 못한 채 소관 상임위인 법제사법위원회에 방치돼 있다. 곧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될 위기다. 21대 국회에서 단 한 차례 논의된 법사위 법안소위 논의 과정에서 법안에 대한 진지한 논의 대신 엉뚱한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법사위 소속 권인숙 의원이 비동의 강간죄를 이미 여러 나라에서 도입했다고 말하자 유상범 의원이 법개정 반대 이유로 "동양과 서양의 문화는 다르다"는 이유를 내세운 것이다. 이날의 논쟁은 추후 공청회를 열어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는 것으로 마무리됐지만, 21대 국회 내내 공청회는 결국 열리지 않았다. 
비동의 강간죄를 논의하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소위에서 오고 간 권인숙 의원과 유상범 의원간 대화
그런데 이 법안은 미투 운동이 시작된 20대 국회에서는 지금의 여당인 자유한국당 나경원 의원을 비롯해 5개 정당에서 여야 의원 10명이 대표발의했던 법안이다. 19대 국회에서도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새누리당 함진규 의원이 강간죄의 처벌 기준을 ‘현저히’ 항거가 곤란한 경우를, 항거가 곤란한 경우로 피해자를 조금 더 보호하는 방향으로 바꾸는 법안을 발의했다. 그만큼 오랜 기간 여러 의원들이 강간죄 개정의 필요성을 느껴왔다는 뜻인데, 21대 국회에서 오히려 논의가 후퇴하고 있는 것이다. 
19대~21대 국회에서 발의된 강간죄 개정 법안 수
7년 전의 사건을 뉴스타파에 다시 털어 놓은 성폭력 피해자 박겨울 씨는 언론과의 인터뷰가 처음이라고 했다.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 나선 이유에 대해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용기를 내게 됐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좀 뭔가 우리도 한 발자국 가야 되지 않나, 어떤 사건이 있을 때만 반짝 이렇게 떠올랐다가 그게 지나고 나면 다시 조용해지고 이게 너무 답답한 거예요. 그 동안에도 저 같은 사람들이나 아니면 다른 피해자들은 계속 양산이 되고 있는데 그게 너무 실망스러워요. 22대 국회에선 꼭 비동의 강간죄 법안이 통과됐으면 좋겠습니다.

박겨울(가/ 성폭력 피해자

헌법불합치 결정 5년이 되도록…무시된 ‘임신 중지’ 권리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낙태죄 조항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위헌적 규정이라며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 2020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법조항을 유지하면서 국회에 개선 입법을 하라고 요구했다. 여성이 안전하게 임신을 중지할 수 있는 법안을 만들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헌재 결정 5년이 다 되도록 관련 법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조항이 헌법에 불합치한다는 결정이 나자 환호하는 여성들의 모습 
국회가 입법 시한을 넘기면서 2021년 1월 1일 자로 낙태죄는 효력을 잃었다. 지금은 임신 중지가 ‘비범죄화’ 되었지만, 그렇다고 안전하게 임신을 중지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전세계 90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유산유도제, 즉 임신 중지 약물이 우리나라엔 아직 도입되지도 않았고, 임신 중지 시술에 건강보험이 적용되지도 않는다. 이런 조치들은 국회 입법과 별도로 정부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지만, 보건복지부와 식약처는 국회가 임신 중지 관련 법을 통과시킨 후에 건강보험 적용 등의 문제를 논의하겠다는 입장이다. 
국회에는 낙태죄 폐지에 따라 여성이 약물과 시술 등으로 안전하게 임신 중지(낙태)를 할 수 있는 법안이 17건이나 발의돼 있다. 하지만 임신 중지를 여성의 권리로 전면 허용하자는 야당 여성의원들의 안과 달리, 임신 초기 이후에는 낙태죄를 유지시키자는 정부와 국민의힘 조해진 의원안이 맞서면서 논의가 제자리 걸음이다. 
임신 주수와 상관 없이 ‘임신 중지’를 허용해야한다는 법안을 낸 이은주 전 정의당 의원은 “국회와 정부가 기독교 등 낙태를 반대하는 쪽의 눈치 보느라 여성 안전을 뒷전에 두고 있다”며 “여성 의원 숫자가 조금 더 많았다면, 조금 더 여성에게 도움 되는 방향으로 법을 논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고 말했다.

4주부터 100만 원…임신 주수에 따라 천차만별인 임신 중지 비용

현재 시중에선 안전성을 알 수 없는 임신 중지 약물이 고가에 음성적으로 거래되고 있고, 임신 중지 시술은 병원마다 시술 가능 여부도, 기간도, 비용도 천차만별이다. 뉴스타파 취재 결과, 서울, 부천, 부산 등의 6개 병원은 무조건 현금으로만 시술 비용을 받았고, 임신 4주 100만 원부터 17주 300만 원 가량을 받는 곳도 있었다. 
임신 중지 시술을 홍보하는 병원 광고. 임신 중지 시술은 건강 보험 적용이 안 돼 병원마다, 임신 주수마다 비용이 천자만별이다. 
이런 비용이 적정한 건지, 어떤 병원에서 시술을 해야하는지 보건복지부가 임신 중지 상담을 받으라고 안내한 공식 상담채널 ‘인구보건복지협회’에 물어봐도 정확한 정보를 받을 수 없다. 인구보건복지협회 상담사는  “저희도 안전하게 시술을 받을 수 있는 병원 정보가 있으면  정말 알려드리고 싶은데, 아직 법적으로 뭔가 제대로 명확하게 나온 게 없다 보니까 한정적인 정보밖에 못 드려서 너무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를 보는 건 가장 열악한 위치에 있는 여성들이다. 낙태죄 폐지 운동을 벌여온 색다른의원의 최예훈 산부인과 전문의는 국회가 낙태를 하는 여성들의 다양한 현실을 모르고, ‘낙태 허용 주수’ 논쟁에 갇혀 최악의 상황을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뒤늦게 임신 중지를 하게 되는 경우는 정말 상황이 안 좋은 경우에요. 임신 중지 비용이 건강보험이 적용이 안 되고 인정이 안 되는 상황이니까 비용 마련을 위해서 또 일을 하거나 이런 상황에서 또 계속 늦어지거나 아니면 파트너가 임신을 계속 유지하기로 하고서 동의를 했는데 파트너의 관계에 서 문제가 생겼거나…어쨌건 안 좋은 수많은 상황들이 대부분이 임신 주수가 이제 넘어갈 때 그런 상황들이거든요. 근데 그때 이제 임신 중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되게 만들어줘야 되는데, 그거를 법으로 다 막아 놓으면 이제 그 이후에는 진짜 더 상상하기 싫은 그런 사건들이 많이 발생을 하겠죠.”

최예훈 / 색다른의원 산부인과 전문의

여성 관련 법안 통과율 1.9%...시급한 법들이 사라지고 있다

21대 국회에는 국민의 삶을 변화시켜 줄 여성 관련 법안들이 1486건 발의됐지만, 그 중 통과된 건 1.9%에 불과하다. 
이외에도 21대 국회에는 △군대 성폭력의 2차 피해를 방지하는 법안 △신체, 경제적 위기의 임신부를 보호하는 법안 △교제 폭력 피해자를 보호하는 법안 △청소년 한부모의 자립을 지원하는 법안 △성희롱한 법인 대표에게 과태료를 물리는 법안 △생리대 가격을 낮추는 법안 등 여성의 건강과 안전을 지켜줄 수 있는 법안이 여러 건 발의됐지만, 모두 논의 테이블에 오르지 못한 채 사라질 운명에 놓였다.
여성 정치 문제를 연구하는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의 황연주 사무국장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여성 의원이 국회에 더 많이 진출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폭력에 관련한 문제들 또는 내 삶과 관련된, 직결된 문제들을 국회에서 다뤄줘야 되는데 이것을 다뤄줄 사람이 없는 것이고, 그것을 다뤄줘야 될 사람이 중년 남성 의원이라는 것에서 여성들은 괴리감을 느끼죠. 내가 삶에서 겪고 있는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이거를 제대로 다뤄줄 수 있을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여성 의원이 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여성 의원이 늘어난다는 건 우리가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어떤 희망,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이에요.

황연주 / 젠더정치연구소 사무국장
<'다양성 국회'를 위한 특별 페이지>에서 각 정당의 여성후보자 현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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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촬영김기철, 오준식, 이상찬, 신영철, 정형민
편집윤석민
CG정동우
제작송원근, 박종화
디자인이도현
출판허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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