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특별기획] 일본 외무성의 '전두환 파일' 최초 공개

2021년 12월 11일 15시 46분

⬤ 뉴스타파, 주한 일본대사관이 기록한 <일본외무성 전두환파일> 1000여 쪽 입수
⬤ 1979년 10월~1980년 6월 문서... 일본이 기록한 ‘미치광이 전두환’
⬤ 박정희 사망 직후 일본의 판단, "전두환이 실세다"
⬤ 전두환 신군부, 5·18 직전 '전두환 의장 JUNTA(군사혁명위원회)' 설치 기획
⬤ 일본 외무성, 12·12 한 달 전 ‘전두환 쿠데타’ 감지
전두환 시대의 잔재청산을 목표로 <전두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뉴스타파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1979년 10월부터 1980년 6월까지 전두환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일본 외무성 문서를 무더기로 입수했다. 주한 일본대사관이 자국 외무성에 보고한 1000여 쪽에 달하는 정보보고 문서다. 뉴스타파는 이미 지난해 5월, 5·18민주항쟁 40주년을 맞아 이 문서 중 일부를 공개한 바 있다.  
뉴스타파는 2019년부터 2년여에 걸쳐 일본 정부를 상대로 이 문서의 공개를 요청해 받아낼 수 있었다. 이후 전갑생 뉴스타파 전문위원, 이재의 5·18기념재단 연구위원, 김용철 5·18기념재단 오월지기와 함께 공동 연구팀을 구성해 번역·해제 작업을 진행했다.
1000여 쪽에 달하는 일본 외무성 문서에선 한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문서의 대부분이 오직 한 사람, 바로 전두환을 중심으로 기록돼 있다는 점이다. 박정희 사망사건부터 80년 5월 광주학살, 전두환의 집권과정이 모두 '전두환 신군부'의 동향을 중심으로 낱낱이 기록돼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학살 직전 전두환의 신군부가 군사혁명위원회(JUNTA)를 설치해 전두환을 의장에 취임시키려 했다는 기록, 전두환이 직접 '북한군 광주 침투설'을 언급했다는 기록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공동 연구팀'이 1000여 쪽에 달하는 일본 외무성 문서에 <일본외무성 전두환파일>이란 이름을 붙인 이유다. 
공동 연구팀의 일원으로 참여한 이재의 5·18기념재단 연구위원은 문서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했다. 
'전두환 파일'에는 정말 놀라울만큼 일본이 한국의 당시 정세변화나 여러 가지 사건의 변화들을 아주 깊숙이 들여다보고 있었고, 어떤 면에서는 미국보다도 훨씬 더 깊숙이 들여다 본 흔적들이 눈에 띕니다. '전두환 쿠데타' 과정에서 전두환과 신군부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보여주는 굉장히 의미있는 정보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재의 5·18기념재단 연구위원
일본에서 5·18민주항쟁을 연구하고 있는 마나베 유코 도쿄대 교수도 <일본외무성 전두환파일>을 매우 중요한 역사기록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정보를 어디서 보고 들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길 정도입니다. 현장에 직접 갔다 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사실관계와 경위가 생생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특히 박정희 사망 이후 전두환과 신군부의 움직임이 정말 상세하게 파악되어 있습니다. 군부와 중앙정보부, 경찰, 정치권 등의 세력관계, 10·26에서 5·18 이후의 역사적 과정을 검증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고 정보 능력이 높은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나베 유코 / 도쿄대 교수
뉴스타파 <일본외무성 전두환파일> 연구팀 회의 모습. 뉴스타파는 2019년부터 2년에 걸쳐 이 문서를 입수해 분석했다.  

#1. 일본이 기록한 '미치광이 전두환'

<일본외무성 전두환파일>에는 5·18민주항쟁 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항쟁 당시 광주 상황이나 한국 군부의 움직임을 단순 전달하는 내용도 있지만, 한국 정치상황을 치밀하게 분석한 보고서도 많았다. 대부분 당시 군부의 실세였던 전두환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 것들이었다. 
1980년 5월 24일 오후 2시 2분, 주한 일본대사관이 자국 외무성에 비밀정보를 타전했다. 소장 계급에 불과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상관이자 대장 계급인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향해 총을 쏜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루머에 불과한 내용이었지만, 일본이 전두환 관련 정보를 얼마나 집요하게 수집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같은 날, 주한 일본대사관은 ‘전두환이 보디가드를 데리고 다닌다’는 내용도 본국에 보냈다. 광주학살을 자행한 전두환과 신군부의 모습을 ‘미치광이’로 표현한 보고서도 있어 눈길을 끈다.  
<일본외무성 전두환파일> 중 상당수는 국내 언론에 공개된 적이 없는 내용이었다. 광주에서 집단학살이 벌어지고 3일 후인 1980년 5월 24일 오후, 전두환이 서울의 한 호텔에서 신문사 편집국장들을 만나 나눈 대화 내용이 대표적이다. 문서에는 이 날 전두환이 "북한군이 비정규군을 앞세운 전쟁을 기획하고 있다"고 언급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때까지 그 누구의 입에서도 나온 적이 없었던 주장이었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두환 추종세력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소위 '북한군 광주 침투설'의 원조가 바로 전두환의 입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광주에서 집단학살을 벌이기 직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사쿠데타를 목적으로JUNTA(훈타), 즉 군사혁명위원회을 만들어 의장에 취임하려 했다는 것도 역시 처음 공개되는 내용이다.<일본외무성 전두환파일>에는 소장 계급에 불과한 전두환이 의장에 오르고, 계엄사령관이자 대장인 이희성이 부의장을 맡는 내용의 조직도까지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었다. 
12·12 군사반란으로 시작된 '전두환 쿠데타'의 마지막 단계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하 국보위) 설치'였다는 게 그간 학계와 법조계의 정설이었다. 1980년 5월 31일 발족한 국보위 상임위원장에 오르며, 전두환이 마침내 정치권력을 손에 넣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외무성 문서에서 확인된 '군사혁명위원회(JUNTA)'는 기존의 논의에 새로운 시사점을 던져준다. 분석을 맡은 이재의 5·18기념재단 연구위원은 그 의미를 이렇게 평가했다.
1995년 검찰이 5공비리와 광주학살 문제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전두환의 신군부가 시국수습대책의 일환으로 군인들로 구성된 비상기구 설치를 준비했고, 이 조직을 이용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사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상기구의 내용은 정확히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비상기구가 아마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을 맡았던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였을 것이다'라고 막연하게 생각해 왔죠. 그런데 이번에 일본 외무성 문서에서 국보위와는 별도 조직을 전두환 신군부가 기획했다는 사실이 발견된 겁니다. 문제의 비상기구가 국보위 보다 먼저 기획된 군사혁명위원회(JUNTA)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굉장히 중요한 자료가 발굴됐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재의 5·18기념재단 연구위원

#2. 박정희 사망 직후 일본의 판단 "전두환이 실세다"

광주학살 6개월여 전인 1979년 10월 28일,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박정희 사망 사건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군인 전두환이 대중 앞에 처음으로 등장한 순간이었다. 당시만해도 전두환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수사결과를 보도한 신문들도 전두환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박정희 사후 한국 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일본의 판단은 사뭇 달랐다.
전두환이 처음 얼굴을 드러낸 당일 저녁 7시 55분, 주한 일본대사관이 자국 외무성에 보낸 보고서에는 의미심장한 내용이 담겨 있다. "소장 계급의 전두환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장보다 더 힘이 세다"는 내용이다.  
3일 뒤인 1979년 10월 31일 12시 30분 주한 일본대사관이 작성한 정보보고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엔  "전두환이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제치고, 군대 내 1인자 자리를 꿰찼다"는 분석 내용이 담겨 있다.  

#3. 일본 외무성에 접수된 '전두환 프로필'

박정희 사망 직후 주한 일본대사관은 한국 정세를 급박하게 자국 외무성으로 타전했다. 첫 텔레팩스가 전달된 시간은 박정희 사망 다음날인 10월 27일 오전 8시 5분, 보고서의 제목은 '한국정정(韓國政情)'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주한 일본대사관의 텔레팩스는 며칠간 숨가쁘게 이어졌다. 전두환이 박정희 사망사건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던 28일 16건, 다음날엔 20건, 그 다음날에도 20건이나 한국 정보가 일본에 타전됐다. 주로 '박 대통령 사망 사건', '한국 정변' 같은 제목이 달린 문서였다.
박정희가 사망하고 6일이 지난 1979년 11월 1일, 주한 일본대사관은 본국에 특별한 보고서를 보냈다.  제목은 '요인 약력'. 한국의 주요 인사들의 프로필을 담은, 손으로 급하게 쓴 문서였다. 그런데 여기에 전두환의 이름이 있었다. 보안사령관이자 박정희 사망사건 수사본부장에 불과했던 전두환이 최규하 국무총리, 정승화 계엄사령관 등과 함께 나란히 이름을 올린 것이다. 이미 일본이 전두환을 대한민국의 실권자 중 한 명으로 판단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1979년 11월 1일 주한 일본대사관이 자국 외무성에 보낸 '요인 경력'. 이 보고서에는 최규화 국무총리, 정승화 계엄사령관 등과 함께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프로필도 담겨 있다.  
<일본외무성 전두환파일>을 보면, 주한 일본대사관이 어떻게 정보를 수집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기록들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한국 기자를 만나 전해 들은 내용이 많았는데,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같은 한국의 주요 정치인들을 직접 만나 들은 얘기를 기록한 보고도 있어 눈길을 끈다. 1980년 6월 3일 주한 일본대사관이 자국에 보낸 문서에는 "6월 3일 오전에 일본 대사가 김영삼 총재의 집을 방문해 1시간 정도 대화를 나눴다"고 기록돼 있다.   
주한 일본대사관이 미국과 북한, 러시아 등에서 자료를 수집했음을 보여주는 문서도 곳곳에서 발견됐다.  1979년 10월 31일,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가 한국 주재 미국 기자단에게 한 말을 기록한 보고서도 그 중 하나다. 역시 국내 언론을 통해서는 알 수 없던 내용이었다. 해당 문서에는 "미국은 박정희 사망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 미국은 한국에서 더 이상 군사정권이 만들어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4. 일본, 12·12 한 달 전 ‘전두환 쿠데타’ 감지

1979년 11월 4일, 박정희 장례식이 열렸다. 그리고 이틀 뒤인 11월 6일, 박정희 사망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이 다시 국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1주일 전 나온 1차 중간수사결과 발표 때와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단독 범행"이라는 내용이었다.  
정승화 총장이 만일의 작전 필요시 지휘에 용이하고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육본으로 갑시다’라고 하자 김재규는 갈까, 말까 망설였고 앞자리에 앉은 박흥주 대령도 ‘육본으로 가지요’라고 하여...방향을 바꾸어 육본으로 향했다. 이때 김재규는 순간적으로 (정승화) 총장을 위협할까 망설였다.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1979.11.6)
그런데 이즈음부터 주한 일본대사관이 자국에 보낸 보고서 내용에서 이상기류가 감지되기 시작한다. 전두환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내용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두환이 2차 수사결과를 발표한 다음날인 1979년 11월 7일 오후5시 30분, 주한 일본대사관은 아래와 같은 내용의 정보보고를 자국 외무성으로 보냈다.  
1979년 11월 18일 자 <일본외무성 전두환파일>에는 '전두환이 사실상 정치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가늠케 하는 기록도 있었다. 전두환이 한양대 총장을 만나 퇴학자 복학·복직·복권과 같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이미 모종의 ‘권력이동’이 이뤄지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렇다면 전두환은 언제부터 정치적 야욕을 품게 됐던 것일까. 뉴스타파 취재진은 1979년 박정희 피살 사건 수사 당시 전두환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인물을 찾아 나섰다. 오랜 취재끝에 박정희 사망사건 합동수사본부에서 수사 1국장으로 일했던 백동림 씨와 관련된 기록을 입수했다. 백 씨가 1995년 검찰 수사 당시 작성한 진술조서다. 여기엔 "전두환의 부하들이 합수본부 시절에 이미 혁명을 준비한 걸로 보인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당시 제가 감지한 것은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 하나회 멤버를 중심으로 5.16이나 각국의 혁명 사례에 대한 연구가 행해지고 있는 것을 그들이 자료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저의 느낌적으로 정치적인 움직임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에게는 두 번에 걸쳐 '사령관님, 지금 정치를 할 시기는 아니니 정치를 하지 마십시오'라고 건의를 하였더니 전 사령관이 '정치는 안 한다'는 말을 되풀이하였던 사실이 있습니다.

백동림 / 당시 합동수사본부 수사1국장(1995년 검찰 수사 기록)
뉴스타파는 현재 경기도 일산의 한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있는 백 씨와 연락이 닿았다. 그는 뉴스타파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전두환이 합동수사본부장 시절에 이미 정치 참여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 전두환이 언제부터 '정권을 한번 잡아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보나.  
"그 당시(합동수사본부 때)부터 생각했어요. 그냥 생각한 거죠, 예전부터. 오래 계획했다기보다 그 당시(합동수사본부 때)에 생각한 거죠. 정권이라는 게 어떻게 순간적으로 되더라고요. 

백동림/ 당시 합동수사본부 수사1국장
취재진은 백 씨와 함께 합동수사본부에 파견됐던 이건개 당시 검사(현 변호사)도 만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전 검사는 "1979년 12월 12일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한 사건은 합동수사본부 관계자들조차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증언했다. 
김재규의 범행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날 정승화 총장이 사건이 벌어진 궁정동 안가에 간 것은 시해사건과 관련이 없습니다. 정승화 총장을 김재규의 공범으로 몰기에는 문제가 있는 상횡이었습니다. 12·12를 일으킨 사람들이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이건개/ 당시 합동수사본부 검사
뉴스타파가 입수한 1000여 쪽 분량의 일본외무성 문서는 전두환 쿠데타 당시 일본 외무성에서 생산된 문서 중 일부에 불과하다. 뉴스타파는 전두환의 사후에도 여전히 역사적 과제로 남아 있는 '전두환 쿠데타의 진실', '광주학살의 진실'을 찾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 
제작진
취재기자강민수 한상진
자료수집전갑생 전문위원
자문이재의 5·18기념재단 연구위원, 김용철 5·18기념재단 오월지기
촬영기자이상찬 최형석
편집기자정지성
CG정동우
일본 현지 취재양태훈
내레이션조경아 이시원
디자인이도현
출판허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