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없었다…이재용 ‘스위스계좌’ 조사도 않고 면죄부

2022년 03월 15일 18시 00분

경찰이 조세도피처 유령회사를 통해 스위스 비밀계좌를 개설한 의혹을 사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조사 한 번 하지 않고 불송치했다. 범죄 혐의가 불분명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경찰의 불송치 결정 배경과 수사 과정을 살펴보면 석연치 않은 점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재용 ‘스위스 계좌’ 개설 목적 페이퍼컴퍼니, 판도라페이퍼스에서 나와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지난해 10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공동으로 1200만 건에 이르는 '판도라페이퍼스' 파일을 분석하던 중, 이재용 부회장의 조세도피처 페이퍼컴퍼니 '배처리파이낸스코퍼레이션'(Bachury Finance Corp.)을 발견했다.
취재진이 판도라페이퍼스 파일에 들어 있는 이재용의 여권 사본 등 여러 문서를 분석한 결과 이 부회장은 2008년 5월 스위스 은행인 UBS의 자산운용부문을 통해 세계 최대 역외서비스 업체인 트라이덴트 트러스트가 영국령버진아일랜드에 만들어 놓은 페이퍼컴퍼니 배처리파이낸스를 매입했다. 배처리파이낸스는 트라이덴트가 전현직 임직원 3명을 차명이사(Nominee Director)로 올려놓은  전형적인 유령회사였다. 이재용이 이 회사를 매입한 이후에도 차명이사는 그대로 유지됐다. 조세당국의 눈을 피해 실소유주 신원을 숨겨주기 위해 역외서비스 업체가 흔히 쓰는 방법이다. 
▲영국령버진아일랜드 소재 법인 '배처리파이낸스 코퍼레이션' 문서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여권 사본이 첨부돼 있었다.
관련 문서에 따르면 이 회사의 실소유주(Beneficial Owner)는 이재용이고, 회사 취득 목적은 스위스 취리히 UBS은행 계좌 개설이라고 돼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스위스 비밀계좌를 개설하기 위해 조세도피처 유령회사 배처리파이낸스를 취득하는 시점은 삼성특검이 삼성그룹과 이건희 회장 일가의 비자금 수사 결과를 발표하는 시기와 겹친다. 
▲트라이덴트 트러스트 스위스 사무소와 BVI 사무소 간 업무 연락 문서에 따르면 배처리파이낸스의 실소유주(Beneficial Owner)가 이재용임을 적시하고, 이 회사 설립 목적은 스위스 은행인 UBS 취리히 지점에 계좌를 개설하기 위해서라고 적혀 있다.

검찰, 뜨거운 감자 ‘이재용’ 스위스계좌 수사 경찰에 떠넘겨

뉴스타파가 이재용 페이퍼컴퍼니와 스위스계좌 의혹을 보도한 이후 참여연대와 경실련 등 여러 시민단체가 수사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고, 지난해 10월 15일 청년정의당이 이재용 부회장을 조세포탈, 재산 국외도피, 범죄수익 은닉 및 가장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은 같은 달 21일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에 배당했다. 범죄수익환수부는 재산해외도피, 자금세탁 등을 수사해 범죄수익을 환수하는 부서다. 
하지만 얼마 안 돼 검찰은 이 사건을 서울지방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로 넘겼다.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검사의 수사개시 범죄 범위에 관한 규정 대통령령에 따르면 이 부회장의 혐의에 적용할 수 있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4조 재산국외도피의 죄제8조 조세 포탈의 가중처벌에 해당하는 사건은 검찰이 직접 수사하도록 돼 있다. 재산국외도피죄는 액수가 5억 원이 넘는 것으로 드러나면 가중 처벌에 해당되는 중죄인데 검찰이 왜 사건 수사를 경찰에 넘겼는지는 의문이다. 경찰이 이런 수사를 더 잘하기 때문에 이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조세도피처 페이퍼컴퍼니 취득과 스위스  취리히의 UBS 은행계좌 개설을 진행한 2008년 4월 당시, UBS자산운용부문은 고객을 4등급으로 나눠 관리했다. 가장 낮은 등급인 4등급 고객이 되려면 최소 스위스화 25만 프랑에서 2백만 프랑, 우리 돈으로 2억 4천만 원에서 19억 5천만 원을 맡겨야 했다.(당시 환율 기준) 3등급(High Net Worth) 고객은 2백만 프랑에서 5백만 프랑(한화 19억 5천만 원~48억 7천만 원), 2등급(Private Wealth Management)은 5백만 프랑에서 5천만 프랑(한화 48억 7천만 원~487억 원)을 맡겨야 하고, 1등급 고객이 되려면 5천만 프랑(487억 원) 이상을 예치해야 했다.
세계 최대 은행의 하나인 UBS의 자산운용부문은 전세계 갑부와 이른바 큰손을 고객으로 두고 있다. 판도라페이퍼스에서 나온 이재용 부회장 관련 문서에는 이 부회장을 관리한 사람이 UBS자산운용부문 일본/한국 데스크 팀장으로 돼 있다. 이 부회장 입장에선 몇 억 원 정도의 푼돈을 스위스에 숨겨두기 위해 차명으로 조세도피처 페이퍼컴퍼니를 사들이고, 그 법인 명의로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를 만드는 ‘수고’를 감수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특히 이 시점은 삼성 비자금 특검 수사 발표 시기와 겹친다.
이 때문에 이재용이 실소유주인 배처리파이낸스 명의의 스위스 계좌에 얼마가 예치됐고, 어떤 자금 이동이 있었는지 철저한 수사가 필요했음에도 검찰은 이 사건을 경찰로 넘겼다. 하지만 이재용 사건을 이관받은 경찰은 여러 한계 때문에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경찰, 금융정보 요청 등 국제공조수사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불송치 결정문에 따르면, 서울지방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는 “배처리파이낸스 명의 계좌 정보 등을 회신받기 위해 국세청, 영국·스위스 국제공조수사 요청 등을 진행했으나 제공 불가 등의 사유로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며 “범죄사실을 특정할 만한 단서가 없는 등 피의자들은 증거가 불충분해 혐의없음 사유에 해당함이 명백하여 수사를 진행할 필요성이 결여된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먼저 국세청에서 배처리파이낸스 명의의 계좌정보를 찾지 못했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이재용 부회장이 해당 해외계좌 보유 사실을 국세청에 신고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관련 정보가 없을 것이다. 경찰은 또 영국령버진아일랜드와 스위스 측에 인터폴을 통해 공조수사를 요청했으나, 해당 국가 당국에서는 인터폴이 아닌 국제형사사법공조 절차에 따라 관련 정보를 요청하라는 답을 받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이뤄진 ‘검경 수사권조정’으로 검찰은 수사권 일부를 경찰에 넘겼지만, 현행 ‘국제형사사법공조법’상 경찰은 직접 외국에 공조 수사를 요청할 수 없게 돼 있다. 현행법상 경찰은 범죄 혐의 등을 담은 영장에 준하는 문서를 작성해 검찰에 전달해야 한다. 그 다음 검찰이 법무부와 외교부를 통해 외국 수사당국에 공조를 요청할 수 있다. 
경찰은 내부 검토를 거쳤으나 이재용 부회장이 스위스 계좌 개설 목적으로 페이퍼컴퍼니를 취득한 사실만으로는 자금은닉, 조세포탈 혐의를 잡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아예 검찰에 국제형사사법공조 절차에 따른 공조수사 요청을 해보자고 말도 꺼내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재용 의혹’ 고발인 조사만 하고 피고발인 이재용은 아예 조사 않아

경찰은 검찰에서 사건을 넘겨받은 뒤 고발인 조사와 참고인 조사까지 벌였다. 하지만 정작 피고발인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본인이나 이 부회장 측에 대해서는 어떠한  조사도 하지 않고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불송치’ 결정을 했다. 경찰은 이재용 부회장의 범죄 혐의 단서가 부족하다는 이유를 들어 국제공조수사 요청도 해보지 않고 사건을 종결했으나, 실제는 수사의지나 능력이 부족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경찰은 또 이재용 부회장의 여권이 발견된 판도라페이퍼스 파일 자체를 신뢰할 수 없었다는 점도 증거불충분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 ICIJ가 공적 기관이 아닌 민간 단체라는 점, 14개 역외서비스 업체 내부 문서를 ICIJ가 입수한 뒤 자체적으로 만든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해당 파일을 국제협업 기자들과 공유한 점 등을 들어, 자료를 신뢰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경찰의 이런 해명도 ICIJ가 지난 10년 간 진행해 온 조세도피처 추적 프로젝트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나오기 힘든 말이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국제협업 취재팀이 지난 2016년 함께 진행한 파나마페이퍼스 보도로 인해 전세계 주요 정치인과 그 측근들은 수사 대상이 됐고, 상당수가 실제 기소됐다.
ICIJ와 BBC, 워싱턴포스트 등 국제협업 취재팀은 지난 2012년부터 전세계 조세도피처에 위치한 역외서비스 업체들의 내부 자료를 입수해 거의 매년 보도하고 있다. 전세계 수사당국과 조세당국은 이 국제협업 보도 내용을 토대로 전현직 정치인, 고위공직자, 재벌 등을 가리지 않고 수사와 조사를 벌였다. 미국 법무부는 ICIJ에게서, 독일 연방검찰은 ICIJ에 자료를 제보한 익명 제보자에 접촉해 직접 자료를 확보하기도 했다. 한국 국세청과 관세청 등도 뉴스타파가 ICIJ와 함께 진행한 조세도피처 추적 프로젝트 기사를 토대로 여러 건의 국외재산도피와 조세포탈 범죄를 적발했고 검찰의 기소로 이어진 바 있다. 

경찰 '단서 부족' 핑계...그러나 차명 보유 페이퍼컴퍼니 자체가 단서다

조세도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는 목적은 여러가지가 있다. 업종 특성에 따라 선박 등을 소유하기 위해, 또는 해외 투자를 위한 특수목적회사나 도관회사로서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는 경우는 어느 정도 허용이 된다. 일반적으로 페이퍼컴퍼니의 주주나 이사도 본사나 본사 관계자를 등재한다. 한국에 있는 본사는 이를 특수관계사나 해외지사로 공시하는 게 보통이고 조세당국은 이 해외 법인의 금융계좌 정보를 받아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재용 부회장의 배처리파이낸스는 이런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이 유령회사 설립과 관리를 담당한 역외서비스 업체 임직원이 배처리파이낸스에 줄곧 차명 이사로 등재돼 있었다. 이 때문에 해당 조세도피처의 당국은 물론 한국의 조세당국도 배처리파이낸스의 실소유주가 누군지 알 수 없다. 이재용 부회장이 이 회사의 단독주주이자 실소유주라는 사실은 역외서비스 업체 트라이덴트와 스위스 은행 UBS의 내부 서버에만 존재했다. 그런데 이 문서가 조세도피처 추적 프로젝트를 통해 공개됐다.
▲세계적인 프라이빗 은행 UBS의 자산운용부문 홈페이지 갈무리
배처리파이낸스는 삼성전자의 사업 목적이 아니라 이재용 개인의 사적 목적, 즉 스위스 은행 UBS의 비밀계좌를 개설하기 위해 설립됐다는 것을 판도라페이퍼스 파일은 뚜렷하게 보여준다. 여권 등 이재용과 관련한 각종 서류가 조세도피처 역외서비스 업체 내부 문서에서 나왔다. 이 자체가 국외재산도피 등 범죄 혐의의 단서가 된다는 건 상식이다. 하지만 경찰은 단서가 부족하다는 핑계를 댔다.

2010년 이후엔 차명 해외계좌라도 국세청에 신고해야

우리 국세청은 지난 2010년부터 해외금융계좌 신고제도를 운영해왔다. 이 제도는 해외계좌의 명의와 실소유주가 다르고, 명의자 또는 명의법인이 국내 거주자가 아닐지라도 실소유주가 국내 거주자라면 국세청에 해당 계좌를 신고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이 제도의 법적 근거가 되는 국제조세조정에 관한 법률 시행령 50조 4항에 따르면 실소유주란 "명의와 관계없이 해당 해외금융계좌와 관련한 거래에서 경제적 위험을 부담하거나 이자·배당 등의 수익을 획득하거나 해당 계좌를 처분할 권한을 가지는 등 해당 계좌를 사실상 관리하는 자"다. 
이재용 부회장은 이 제도가 시작된 2010년부터 배처리파이낸스가 서류상 청산된 2013년 사이에는 자신이 실소유주인 배처리파이낸스 계좌를 국세청에 신고했어야 했다. 국세청에 따르면 제출한 자료는 10년간 보관하도록 돼 있다. 
이 부회장을 고발했던 청년정의당은 불송치 결정문을 송달받은 지난 3월 3일 이 처분에 대한 이의제기를 경찰에 접수하겠다고 밝혔다. 고발인의 이의제기가 들어오면 검찰은 사건 기록을 검토한 뒤 경찰에 보완수사를 명령하거나 자체적으로 사건을 종결할 수 있다.
제작진
디자인이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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